[ET단상]통상마찰과 정부의 역할

 경제주체는 대개 가계·기업·정부로 정의된다. 산업화 시대는 정부의 역할이 주도적이었고 대단히 강조됐다. 정부는 청룡을 그림에 있어 눈동자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시대로 전환되면서 각 주체가 몰라보게 변모하고 있다. 기술과 지식이 발전요인이 되는 지식기반사회가 심화될수록, 또 글로벌화가 확산될수록 개인과 기업이 중심이 되고 있다. 개인이 자율적으로 움직이게 된다면 생산성이 향상되고 시장은 발전하고, 정부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아진다.

 하지만 고개를 바깥으로 돌려보면 정부의 역할을 다시금 강조해야 할 곳이 있다. 그중 하나가 무역 분야다. 지식기반시대에도 국가 간 거래에서 분쟁은 항상 일어나며 이러한 통상마찰을 조사하고 최종 결정하는 권한은 정부가 쥐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역할은 일층 분발해야 하는 것이다.

 최근에 발생한 통상마찰에서 그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올 2월 초 우크라이나정부는 중국에서 생산돼 우크라이나로 수출되는 삼성과 LG의 냉장고에 대해 덤핑 무혐의 판정을 내렸다. 함께 피소된 터키와 중국산 냉장고는 100% 내외의 고율 반덤핑 관세가 부과됐다.

 이번 우크라이나 냉장고 덤핑 사례에서 먼저 느낄 수 있는 점은 우크라이나 내부의 정치적인 중량감이다. 제소 당사자인 노드(NORD)사의 오너는 국회의원으로 행정부 요소요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벅찬 상대로 평가됐다. 노드사는 한국 업체들의 수출 가격과 우크라이나 수입 업체들의 저가 신고가격 차이를 덤핑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른바 언더밸류 문제다. 국내 업체들은 언더밸류는 우크라이나 수입 업체들의 잘못된 관행으로 정상 수출가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항변했다. 심지어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수입 업체들의 저가 신고로 정부의 관세수입이 격감되고 있으니 이를 시정하라고 지시한 바도 있다.

 관세회피를 위한 저가 신고 관행은 많은 나라에서 적지 않는 문제를 일으키고 있을 뿐 아니라 수출 업체와 수입 업체 간 어느 정도 묵계가 이루어지면서 행해지고 있다는 정치적 판단도 작용할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논리적 체계가 쟁점이 아니라 목소리 큰 쪽이 이길 가능성도 상존한다. 우크라이나 무역당국이 잣대를 자의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 순간이다.

 이때가 바로 정부가 나서야 할 시점이다. 그간 해외에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우리 정부는 무엇을 하느냐며 한탄과 질타를 받은 적도 꽤 있었지만 우크라이나 냉장고 반덤핑건에는 정부가 손발을 걷어붙이는 제대로 된 액션을 취했다. 외교통상부는 한국 업체지만 제품은 중국산이라는 원산지 때문에 조심스러웠으나 글로벌시대 기업이 지리적인 국경선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판단하에 정부 대 정부 협상에 나선 것이다.

 작년 말 수입규제대책반을 비롯한 정부대표단이 우크라이나를 방문, 우크라이나 내부의 저가 통관신고의 문제점과 WTO 규정에 합치되는 공정한 조사를 요청했고 통상교섭본부장 명의로 합리적인 조치를 요망하는 서한을 우크라이나 경제부 장관 앞으로 전달했다.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를 초치, 공정 심사를 촉구했다.

 1년간 마음 졸이게 한 무혐의 결정은 당장 우크라이나 수입냉장고 시장을 석권할 전화위복의 호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의 수입 냉장고는 연간 약 30만대로 추정되며 이 중 3분의 2가 중국산 삼성과 LG 브랜드다. 한국 브랜드의 가격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제고되고 중급시장에서 부상하던 터키와 중국업체의 냉장고는 고율의 관세로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됐다.

 중장기적으로 정부의 역할 재정립과 글로벌시장에서 우리 기업의 경쟁력, 수익성 확대에 일조하게 된 것이다. 국내 브랜드의 현지 생산제품이 타국에서 제소당했을 때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이정표를 만들었다. 이번과 같이 민·관이 합심, 유기적으로 슬기롭게 대처함으로 국내 전자 업체들은 글로벌화에 일보 진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윤동훈 한국전자산업진흥회 전자연구소장 dyun@goke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