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 HP가 변하고 있다. 5년 연속 세계 PC 시장 1위를 달리고 있지만, 오늘에 안주해서는 미래에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감 때문이다. 개혁의 바람은 신기술 개발의 최첨병인 연구소에서부터 불었다. EE타임스에 따르면, HP의 연구개발(R&D)을 총괄하는 HP랩스는 최근 연구소를 상징하는 로고<사진>를 바꾸고 기존 150개 연구팀에 2∼3명씩 흩어진 600명의 연구인력을 5대 연구분야 23개 연구팀 체제로 재편하는 조직 대수술을 단행했다. 프리스 바너지 박사가 딕 램프먼 연구소장의 뒤를 이어 신임 소장에 취임한 지 꼭 반년 만이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바너지를 발탁한 마크 허드 CEO가 HP랩스를 앞세워 HP 조직 전체에 혁신을 불러오려는 포석을 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프로젝트 ‘줄이고’ 기초연구 ‘늘리고’= 지난해 8월 HP의 새 R&D 수장직에 오른 바너지 소장은 “R&D과제의 옥석을 가리는 심의기구를 연구소 내부에 신설, 연간 30개 과제를 심의 대상에 올린 뒤 이 중 최종 6개 과제를 선정, 각 500만달러 가량의 예산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HP랩스의 한 해 예산은 1억5000만달러 가량이다.
이번 조직 개편은 소규모 과제를 2∼3년간 수행한 뒤 연구를 계속할지를 결정하는 기존 실리콘밸리 R&D 관행과 달리 프로젝트 초기부터 될 성부른 떡잎, 즉 시장성이 보이는 과제을 선별해 중점 육성하겠다는 전략을 담고 있다. 연구 분야도 △정보 관리 △클라우드 컴퓨팅(cloud computing) △디지털 콘텐츠 △인텔리전트 인프라스트럭처, △친환경기술(sustainability) 등 크게 5개로 통합된다.
HP는 대신 연구소 업무의 10% 미만이던 기초 연구 비중을 30%까지 끌어올리기로 했다. 기초 연란 단기간 내에 특정 제품을 상용화하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없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연구 역량을 확보하기 위해 순수 연구 활동을 가리킨다. 마크 허드 HP회장은 “(HP랩스는) ‘R&D’(연구개발) 중 ‘R’(순수 연구)이 여전히 존재하는 곳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연구에서 사업화 ‘원스톱’= 완성 단계에 있는 과제의 경우 연구와 개발 업무의 벽이 허물어진다. HP는 연구팀에 사업부 직원을 투입시켜 연구소에서 본사로 넘어가기 직전 기술을 상용화하는 프로토타입 사업 모델을 R&D인력과 영업인력이 함께 만들도록 할 계획이다.
연구소 벤처 프로그램과 기술이전사무소도 신설된다. 연구소 벤처 프로그램은 실리콘밸리의 현직 벤처캐피털리스트를 HP랩스 내에 상주시켜 연구소 벤처를 발굴하는 것이 골자다. HP 내에 작은 실리콘밸리를 만드는 셈이다. 기술이전사무소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HP랩스가 보유한 기술을 공개하고 이를 원하는 대학이나 기업에 팔아 수익을 창출하는 역할을 맡는다.
HP랩스의 이같은 변화는 바너지 소장 자신이 일리노이대학 공대학장을 역임하고 벤처를 경영하는 등 학교와 기업을 두루 경험했기에 가능했다. 바너지 소장은 2000년 소프트웨어벤처 엑셀칩을 설립한 뒤 2006년 자일링스에 2100만달러를 받고 매각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기초연구 분야는 유명학술지나 컨퍼런스 발표 논문 수, 응용연구는 특허 출원 건수, 개발 분야는 상용화 건수로 실적을 평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윤아기자@전자신문, foran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