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소프트웨어(SW)업체 A사는 지난해 한 시중은행이 진행하는 SW 벤치마킹테스트(BMT)에 참가하자는 협력업체 B사의 제안을 받았다. A사는 금융권 고객사이트를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믿고 6개월 동안 자사 개발자를 B사에 사실상 파견, 적극적으로 솔루션 개발을 지원했다. 하지만 얼마 후 해당 은행은 또 다른 SW업체 C사의 솔루션을 도입하기로 결정했고 결국 A사는 배제된 채 B사와 C사가 사업기회를 얻었다.
공정한 경쟁 속에 사업기회를 놓치는 것이야 치열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감수해야 할 일이었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BMT 참가를 종용하며 A사를 끌어들인 B사는 A사에 그간 발생한 솔루션 개발비를 지급할 수 없다는 방침을 전해왔다. 고객의 최종 선택을 못 받은 솔루션 개발비용까지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후 절박해진 A사는 한 달 넘게 B사에 상황을 설명하며 개발비 환급을 요구했지만 결국 투자비용의 절반을 돌려받는 것에 만족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이른바 ‘갑’과 ‘을’로 불리는 고객과 SW업체 간 관계가 뒤틀릴 대로 뒤틀렸다는 지적이다. SW를 최종 구매하는 기업 고객은 물론이고 SW업체와 상생 관계를 유지해야 할 IT서비스업체마저 또 하나의 갑으로 군림하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왜곡된 갑과 수직관계를 개선해야 SW업계가 자생력을 키울 수 있고 이를 통해 국내 SW산업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멀고 먼 ‘갑’과 ‘을’=앞서 언급한 사례는 국내 SW시장에서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SW업계에 몸담고 있는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이러한 사례를 손쉽게 얘기해 줄 정도로 그릇된 갑·을 관계는 국내 SW시장의 일상사로 자리 잡았다.
SW업계에서는 고객이 지급한 BMT 비용을 IT서비스업체가 중간에서 가로채는 것이 관례처럼 굳어졌다. 공공기관이 주관하는 BMT에 참가하면 해당 기업에 출장비와 식비까지 정산 지급되지만 IT서비스업체 중심의 컨소시엄에 속해 참여한 SW업체에는 ‘그림의 떡’이다. 공공기관에서 총실비를 지급받은 IT서비스업체가 이를 분배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지방 출장은 1인당 10만원 이상의 실비가 지급되는만큼 수십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장기간 치러지는 BMT라면 수십개의 협력사를 거느린 IT서비스업체는 BMT 비용으로만 수억원의 이익을 챙기는 셈이다.
공공기관 사업 컨소시엄에 참여했던 한 SW업체 마케팅 이사는 “IT서비스업체가 대전 통합전산센터 관련 BMT에서 수십억원의 실비를 챙긴 것으로 안다”며 “이 중 단 한 푼도 BMT에 함께 참여한 협력사에 지급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민간 기업이 발주하는 IT프로젝트의 사정도 나을 게 없다. 현재 대부분의 민간 기업은 BMT 비용을 아예 지급하지 않거나 형식적인 수준에서 지급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때에는 IT서비스업체는 물론이고 SW를 공급하는 개발업체 모두 힘든 상황을 맞게 된다. 그나마 프로젝트를 수주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속된 말로 ‘돈은 돈대로 날리고, 몸만 버린 꼴’이 된다.
◇멀고 먼 ‘상생의 길’=물론 개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발주자와 수주업체 간 고질적인 병폐가 계속됨에 따라 SW 관련 협단체와 업계를 중심으로 뒤틀린 갑을 관계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시도되고 있기는 하다.
지난해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는 옛 정보통신부와 함께 ‘대중소 상생지표’를 작성했다. 현금결제율을 비롯한 평가지표를 통해 대기업과 협력사 간의 협력정도를 파악한 것이다. 조사결과가 외부에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협력업체가 대기업에 대해 직접 상생 점수를 매긴다는 것만으로도 대기업과 협력사 간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업계는 기대하고 있다.
이에 더해 SW산업협회는 올해 공정거래위원회 하도급정책팀과 함께 SW사업 표준하도급계약서를 홍보하고 올바른 하도급 관계를 제시하는 설명회 등을 다양하게 개최할 예정이다. 협회 관계자는 “표준하도급계약서는 의무사항이 아닌 권장사항이기 때문에 발주자와 사업자 모두를 대상으로 한 지속적인 홍보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갑을 사이의 수직선이 수평선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더 많다고 지적한다. 한 중소 솔루션유통업체 대표는 “대형 IT서비스업체가 소규모 SW업체를 동등한 파트너가 아니라 하도급업체로만 인식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관련 법률 개선과 지속적인 교육 캠페인을 통해 갑을 관계를 정상화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IT서비스업체뿐 아니라 발주자 측면의 개선도 시급하다. 특히 민간 기업에 비해 IT 전문역량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받는 공공기관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SW발주에 관한 전문성이 부족한 공무원이 IT프로젝트를 진행하면 의도적이지 않더라도 SW사업자에 불필요한 짐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발주자의 수요예보 시스템을 활성화해 SW업체가 이에 맞춰 정상적인 사업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환경도 마련돼야 한다. 통상적으로 SW발주가 갑작스럽게 이뤄지면 납품 일정이 빠듯해 무리한 사업 수행이 불가피하고 이는 결국 발주자 쪽에서도 정상적인 결과물을 얻을 수 없는 사업실패에 직면할 수 있다.
◆부당 하도급 어떤 게 있나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해 ‘부당한 하도급대금 결정 및 부당 감액행위 심사지침’을 마련해 공개했다. 이 지침은 강행규정에 해당되기 때문에 해당 규정을 위반했을 때 합의서가 있다고 할지라도 이를 무효화시킬 수 있는만큼 원사업자에 해당되는 IT서비스업체와 수급사업자인 SW업체 모두 숙지가 요구된다.
◇부당한 하도급 대금 ‘결정’=원사업자가 별도의 가격책정 모델을 적용해 산출한 금액을 가격인하 근거로만 활용하고 가격인상 근거 자료로는 활용하지 않는 때가 이에 해당된다. 원사업자가 계속적 거래관계에 있는 수급사업자에게 확정되지 않은 초안 상태의 생산량 감축 계획 문건을 보여주는 등의 방법으로 거래중단 또는 물량감축 의사를 내비치는 것도 부당 행위다.
거래의존도가 높은 수급사업자에게 거래처 변경 시 경영상 어려움이 가중될 우려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가격인하를 유도하는 일도 이의 사례다.
지침은 ‘현저하게 낮은 수준’으로 하도급 대금을 결정하는 사례도 지적했다. 경영수지가 악화되고 있는 수급사업자에게 목적물 완성에 필요한 인건비에 상당하는 금액을 인하함으로써 수급사업자 경영에 부담을 초래하는 경우다.
◇부당한 하도급 대금 ‘감액’=원사업자가 구두로 납기 등을 연기한 후에 서면계약서상의 납기를 준수하지 않았다며 하도급 대금을 감액하거나 최초 계약과 달리 환차손을 수급사업자에게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마찬가지로 원사업자가 일방적으로 결제화폐를 수급사업자에 불리한 화폐로 변경하여 환율변동에 따른 손실을 부담지우는 것 역시 부당행위다.
수량 감축을 통한 대금 인하도 흔히 일어나는 부당행위 중 하나다. 원사업자가 단가·수량을 기반으로 하도급 대금을 확정한 후에 갑작스레 수량을 감축, 하도급 대금을 줄이고 단가인상 등의 보전책을 제시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인프라가 부족한 중소기업의 사정을 악용하는 것도 부당행위다. 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에게 무상으로 장비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한 후 사전 협의없이 일방적으로 하도급 대금에서 장비 사용료를 공제하는 식이 이에 해당된다.
이 밖에 원사업자가 접대비 등의 영업활동비를 사업 수주와 관련 있다는 이유로 수급사업자에게 부담시키거나 발주·납품 후에 이뤄진 사업원가 하락요인을 근거로 하도급 대금을 줄이는 것도 모두 부당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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