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시황이 아직은 본격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초의 공급과잉 상태가 쉽게 해소되지 않고 있다. 지금쯤이 바닥일 것으로 추측되지만 3∼4년간 상당한 호황을 누렸던만큼 불황 탈출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자연현상이나 인간사나 산이 높으면 골이 깊게 마련이다.
지금은 주주총회 시즌이다. 지난해 실적을 놓고 업종별·기업별로 희비가 엇갈린다. 하이닉스도 외국 경쟁사들보다 선전했다고는 하나, 부족하고 아쉬움이 많은 해였다. 그러나 성과 여부를 떠나 1년 단위의 단기 평가는 문제점이 있다. 또 재무제표가 기업 전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재무성과뿐만 아니라, 환경 및 사회적 책임을 포함하는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작성하는 기업이 증가하고 있다.
지속가능경영은 1987년 유엔환경계획(UNEP)이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표방한 이후 1992년의 리우 정상회의, 2002년의 요하네스버그 정상회의를 거쳐 구체화되고 있다. 주주중심의 경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임직원·고객·주민·정부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위한 경영을 해 나가는 것이 기업의 장기적 성장 발전과 주주이익에도 부합한다는 사조다. 주주자본주의의 원조인 미국에서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고 있다. 요하네스버그 정상회의 이후 경제책임·환경책임·사회적책임을 지속가능경영의 3대 축으로 제시하고 있으나 기업이 추구해야 할 가치와 책임은 시대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알프레드 마샬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본주의는 ‘진화하는 생물’인 것이다.
기업의 여러 책임 중에서 경제책임이 가장 기본이다. 수익성·성장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다른 책임들을 완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10억명 이상의 인구가 하루 1달러 이하로 연명하고 있는데 환경만을 너무 고집할 수는 없는 일이다. 빌 게이츠는 이른바 ‘창조적 자본주의’를 주창하면서 기술발전을 이용해 빈곤을 퇴치하는 데 동참해 줄 것을 촉구한다. 경제성과로써 불평등 해소를 도모한다는 점에서 ‘경쟁’이라는 시장과 ‘공생’이라는 배려가 함께하는 따뜻한 사회를 지향한다.
하이닉스는 올해 지속경영 보고서를 발간한다. 기업의 책임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넓은 범위의 이해관계자와 소통하고 이웃의 어려움을 함께 걱정하는 ‘영혼이 있는 기업’ ‘인간의 모습을 한 기업’이 돼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첫해부터 좋은 성적의 보고서를 낼 생각은 없다. 환경감시는 아예 환경운동연합에 의뢰해 놓았는데 이 단체의 높은 환경의식과 전문성으로 보아 하이닉스가 지금 당장 우수한 등급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매년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모자라는 점을 지속 보완해 나가면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내 시간의 3분의 2는 회사의 미래를 위해 쓰기로 했지만 시황이 어려운 탓에 어느새 또 현실문제로 돌아와 있곤 한다. 골이 깊었으니 이제 올라가는 길만 남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수익성이 좋아지면 하고 싶은 일도 많다. 회사의 장기 성장 발전 기반을 강화하고, 주주들은 물론이고 여러 이해관계자의 관심을 좀 더 많이 챙기고 싶다. 그래서 하이닉스가 수백년을 지속할 수 있는 틀을 다지고 싶다. 2만3000명이 함께 꾸는 꿈이니 현실이 되지 않겠는가.
김종갑 하이닉스반도체 대표 jongkap.kim@hynix.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