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면 정부의 연구개발(R&D) 사업 지원계획 설명회가 정부 부처별로 진행된다. 올해는 정권교체 시기임에도 이른바 ‘친기업 정부’의 출범을 향한 기대치가 높아서인지 설명회의 관심도가 예년보다 훨씬 높아진 것 같다. 교육과학기술부·지식경제부·중소기업청 등의 설명회 장소에는 예상인원을 훨씬 넘는 고객(기업·대학·연구소)으로 북새통을 이루어 인쇄 자료들이 모자라 사후 우편발송을 약속하는 등의 해프닝도 일어났다.
이처럼 매년 변함없이 국가 R&D를 향한 열기가 뜨겁게 뿜어져 나오는 설명회의 진행 방식은 대동소이하다. 몇 가지 특징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먼저 공급자인 정부 측은 R&D 예산이 전년 대비 몇 % 늘었으며, 중점 추진방향은 어떠하다는 등의 예산확보 과정을 설명한다. 이어서 한정된 예산을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수요조사를 한다. 선택과 집중의 원칙을 적용해 특정분야에만 지원한다는 설명을 하고 사업항목 소개와 접수일정, 신청자격, 관련근거 등을 나열식으로 소개한다.
반면에 설명내용을 꼼꼼히 메모하며 청취하는 수요자인 기업·대학·연구소 R&D 담당자들은 본인이 필요로 하는 분야는 대상에서 제외됐다면서 개발 위험부담이 적은 분야까지 확대 지원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한다. 사업 수가 너무 많아 적합한 사업이 어느 것인지 선택하기가 힘들다고 볼멘소리를 내기도 한다. 사업계획서를 준비할 시간을 충분히 달라는 주문도 빼놓지 않는다.
수요자는 자기 입맛에 맞는 사업에 대해 쉽고 여유 있게 지원해 달라고 요구하고 정부는 보조자금을 개발위험도가 높아 시장에만 맡겨 둘 수 없는 특정 분야에 대해 상반기에 신속하게 지원하겠다고 한다. 한마디로 수요자든 공급자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요자와 공급자의 요구를 동시에 충족시킬 R&D계획은 없는 것일까. 먼저, 공급자인 정부는 수요조사에 의해 지원 분야를 정하더라도 지원자 간 상호경쟁을 할 수 있게 문호를 넓혀야 한다. 우리나라는 특정 분야 전공자 및 기업의 층이 얇기 때문에 공고 내용의 폭이 좁아지면 특정인만이 지원 가능한 분야로 축소된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지원 분야를 선정할 때 사전에 충분히 여론을 수집하고 반드시 공청회를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미처 수요조사에 반영되지 않은 분야도 신청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자유 분야 등으로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한다.
끝으로 공고 내용은 공급자 위주가 아닌 수요자 위치에서 작성, 해당사업의 예년 경쟁률 및 지원금액 등 구체적인 통계치를 제시해야 한다. 수요자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정보를 통해 무모한(?) 기대를 사전에 배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업 계획서 작성 준비기간도 한 달 이상의 여유는 주어야 한다.
수요자인 기업이나 교수도 자신이 개발하고자 하는 계획은 산업적 측면에서 핵심기술로써, 개발완료 후 파급효과가 큰 기술로써, 성공 가능성에 대한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또 개발계획은 기초연구와 인프라를 갖추고 소요예산도 어느 정도는 자체 조달하면서 정부에 일부를 보조 요청하는 수준이어야 한다.
이 같은 방안의 현실화를 위해서는 정부가 지원하는 500여개 R&D 지원사업만큼은 행정서비스에 대해 사업 간 경쟁을 유발시키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예컨대 사업을 얼마만큼 쉽게 공고했는지, 계획 수립 시 수요자 의견이 어느 정도 반영됐는지, 평가 결과 및 연구비는 얼마나 신속하게 전달됐는지 등을 놓고 민간이나 언론에서 평가해 홍보 및 칭찬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공급자와 수요자가 동시에 만족하는 R&D계획을 마련하는 것은 우수연구자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하고, 예산을 증액하고, 평가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일 등에 못지않게 국가 R&D 예산의 효율성 증대와 정부 R&D 협력체계의 선진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판단된다.
우창화 산업기술평가원 기술평가본부장, woo@itep.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