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시장 선발사업자와 후발사업자 간 경쟁이 심화되면서 콘텐츠 중요성과 함께 방송 콘텐츠 공정거래 원칙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다. 또 IPTV 사업 관련 시행령 제정을 앞두고 프로그램의 공정거래원칙에 관한 논의도 활발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최근 자주 거론되는 것이 프로그램 동등접근에 관한 원칙(PAR:Program Access Rule)이다.
이는 방송사업자 간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는 프로그램(채널)에 대한 동등접근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논의를 보면, 미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PAR의 몰이해에서 비롯된 그릇된 주장과 사업자의 이해관계에만 몰입해 근본취지를 왜곡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어 논의의 파행이 우려된다.
대표적인 것이 PAR가 시행되면 “사업자 간 자유로운 경쟁이 저해된다”든지 “모든 플랫폼의 채널 구성이 똑같아질 것”이라는 케이블TV의 주장이다.
PAR는 케이블TV의 주장과 달리 경쟁을 저해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경쟁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관련 법규의 제목부터가 “영상 프로그램의 유통 및 전송에 있어서 경쟁과 다양성의 증진(Development of Competition and Diversity in Video Programming Distribution and Carriage)”으로 돼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미국 커뮤니케이션 법의 관련규정은 “채널을 공급하는 사업자는 케이블 사업자 또는 여타 다채널 방송사업자와의 영상프로그램 판매에서 가격·기간·조건 등에 차별을 두어서 유통의 경쟁질서를 저해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채널 공급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거래거절’과 같은 “차별적 행위로 경쟁질서를 저해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시장자율 원칙과 계약 자유에 우선적 가치를 두고 있는 미국에서조차 PAR가 오래 전부터 정착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국내에서와 같이 미국에서도 시장지배적 사업자가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인기채널을 ‘자사의 울타리에 가둠(binding)’으로써 경쟁원리를 위반하는 불공정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규제기관도 채널독점을 플랫폼 간 경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결국 시청 소비자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대표적인 불공정행위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즉, 채널공급 관련 불공정행위 규제를 통한 플랫폼간 경쟁유도가 사적 자율계약 원칙보다 정책적 실익이 훨씬 크다는 판단인 것이다.
국내에서도 방송위원회는 이미 2005년 미국의 PAR와 거의 동일한 내용의 ‘방송프로그램의 공정거래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고, 최근의 위성방송과 케이블 PP 간의 채널거래 분쟁에도 위성방송에 합리적 가격으로 채널공급을 재개하라는 권고를 내린 바 있다.
선발 케이블TV와 후발 위성방송이 경쟁하는 국내 유료방송시장에서 2003년부터 지금까지 위성방송으로부터 이탈된 주요 인기채널 수는 7개에 이른다. 시장원리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이와 같이 프로그램 제공업체가 채널을 공급할 수 있는 창구를 스스로 축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단일 플랫폼에만 채널을 공급하는 것보다 여러 플랫폼에 제공하는 것이 더 큰 수익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원소스 멀티유스의 이점마저 포기하고 채널공급 거부에서 더 나아가 기존 채널의 송출마저 중단하는 것은 지금의 방송시장이 극히 비정상적 상태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송시장의 불공정 요소에 대한 우려를 반영하듯, 최근 한 방송통신위원회 관계자는 다른 플랫폼에 채널공급을 인위적으로 막는 것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공정거래 위반행위”라고 지적한 바 있다. 현재 방송시장의 채널 공급관련 관행화된 불공정 행위를 고려할 때, 이러한 지적은 때 늦은 감이 있다.
그러나 더욱 시급한 문제는 아직 등장하지도 않은 매체에 대한 프로그램 공급원칙이 아니라 기존 시장의 불공정 행위에 대한 규제다.
방송이라는 공적 서비스의 특성상, 일부사업자에 의한 시장 독점, 채널 독점은 결국 시청자의 시청권 침해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방송통신위원회 등 규제기관은 방송시장의 불공정행위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성길 스카이라이프 콘텐츠본부장 moon@skylif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