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집에 돌아가 저녁식사를 마치면 일단 하루의 긴장을 풀고자 가족 모두 TV 앞에 모이는 일이 많다. 그러면 각자 자기가 원하는 채널을 보려는 실랑이가 벌어지곤 하는데 가정마다 독특한 규칙에 따라 보는 순서가 결정된다.
TV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화면(채널) 쟁탈전은 가족 사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방송을 제공하는 사업자 간의 거실 TV 쟁탈전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됐다. 지상파 방송사 간에 시작된 ‘TV 채널 차지하기’ 경쟁에 종합유선방송과 위성방송이 차례로 참여한 것이다. 이 같은 사업자 간 쟁탈전에도 가정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규칙이 있다.
그런데 최근 인터넷(IP)TV라는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했다. 이로 인해 TV를 차지하려는 가족 간의 쟁탈전은 더욱 복잡해졌다. 예전에 TV로 불가능하던 인터넷이 IPTV에서는 가능해지면서 TV를 포기하고 PC로 가던 구성원까지 TV를 차지하려 한다. TV 쟁탈전이 더욱 치열해지게 된 것은 당연한 순서.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쟁탈전 때문에 가족의 불편이 늘어난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전보다 더 즐겁다.
그렇다면 과연 경쟁의 규칙은 어떨까. 과거 정부가 정책 목표에 따라 정해놓은 방송의 규칙을 이미 포설된 전송망(통신망)을 운영하는 사업자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어렵다. 또 IPTV가 순수 방송이 아니라 방송과 통신이 융합된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기존의 방송규칙을 약간 수정하는 것도 합리적인 규칙이 될 수 없다. 더구나 종합유선방송의 영화채널에 적용되는 편성규제를 영화가 모인 주문형비디오(VoD)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기존의 규칙이 어긋나기로는 방송만이 아니다. 통신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은 망을 자유롭게 서로 연결하고 동일한 통신방식을 사용하는 규칙이 있다. 그런데 새롭게 등장한 IPTV에 인터넷의 기존 규칙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의 인터넷망에서 자신의 콘텐츠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타사의 콘텐츠 전송을 억제하는 행위가 무조건 부당하다고 보기 어려운데, 바로 동영상 채널이 가져야 하는 품질보증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규칙을 정하지 않고서는 논란이 해결될 수 없다. IPTV 규칙을 정하면 다시 기존의 방송이나 통신 규칙마저도 수정해야 한다. IPTV가 기존의 방송이나 통신과 경쟁하기 때문이다.
융합서비스가 던지는 화두는 기존의 규칙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난제들이다. 이 때문에 융합서비스가 도입되지 못하고 가족 간의 ‘즐거운 TV 쟁탈전’ 기회가 박탈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근 방송과 통신의 규칙을 정하는 정부기관을 융합시킨 것도 ‘즐거운 TV 쟁탈전’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융합기관은 앞으로 기존의 규칙을 총체적으로 재검토하고 새로운 토대에서 하나하나 다시 쌓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국민 개개인의 소통을 결정할 중차대한 문제의 해답을 찾아본 경험이 없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현재의 방송과 통신의 규칙을 대체할 새로운 규칙, 방송과 통신을 모두 포괄하는 통합적 규칙을 만드는 것이 우리나라만의 고민은 아니다. 초고속 통신이 가능한 인터넷과 디지털전환을 앞둔 방송을 가진 모든 나라의 공통된 고민이다. 이럴 때 비슷한 고민과 상이한 경험을 한 국가들이 모여 머리를 맞댄다면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따라서 오는 6월 서울에서 개최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장관 회의가 기대된다. OECD 회원국들이 융합의 규제 틀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는지를 직접 확인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소비자와 사업자들도 이번 OECD의 논의를 지켜보면서 세계적 추세에 동참하고 소비자의 이익을 증진하는 데 함께해 사회의 발전과 자신의 성장을 동시에 추구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염용섭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ysyum@kisd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