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도 잘못된 ‘번역’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국경을 초월한 산업정보의 교류, 시장의 급격한 확대에 따라 번역에 대한 수요와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경쟁이 치열한 국제시장에서 수출기업에 필요한 이른바 ‘산업번역’의 중요성은 기업의 수출경쟁력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다.
4년 전, EU 국가에 건설장비를 수출하는 모 기업의 담당자와 만났다. 제조물책임법(PL법) 때문에 제품이 수출되는 20여개국의 각 해당 언어로 매뉴얼을 제작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수년간 해외의 전문번역 회사에 의뢰해 왔지만 너무 골치가 아파 국내 업체를 알아보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그동안 어차피 언어를 모르니 번역품질 확인은 포기하더라도, 수출 납기가 지나도 매뉴얼이 나오지를 않고, 기종 변화에 따른 번역분량이 얼마되지 않는데도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들며, 더구나 이런 문제를 놓고 커뮤니케이션조차 용이하지 않다는 것이 당시 그의 고민이었다. 그 후 여러 검증 과정을 거친 후 우리 회사가 그 작업을 진행하게 되면서, 더 심각한 문제를 발견했다. 수년간 번역 작업을 해 왔으면서도 매뉴얼 번역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전문용어, 단어 등의 번역메모리 데이터베이스(DB)가 없었고, 슬로베니아 매뉴얼에 헝가리어가 섞여 있는 등 품질 상태가 상당히 문제가 있어도 한국의 본사에서 통제할 수가 없었다.
사실 이런 문제가 바로 산업번역 분야에서의 핵심 과제다. 몇 년 전부터 국내 기업의 해외공장 설립이 많아지고, 국내 소프트웨어(SW)나 시스템이 해외로 활발하게 수출되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수출 대상국도 유럽·동남아·중동 등 전 세계 국가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품질·전달·가격(QDC:Quality·Delivery·Cost)’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됐다. 즉 정확하고 신속하게, 또 적절한 비용으로 시스템이나 SW, 제품 설명서 등을 다양하고 낯선 언어로 현지화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과제가 등장한 것이다. 게다가 산업번역은 내용 대부분이 첨단기술 분야의 전문 용어와 기술적인 문장으로 구성돼 있어 어려움을 더한다.
이러한 번역은 번역사의 능력에만 의존할 수 없다. 전문 용어를 표준화하고, 이미 번역된 동일한 문장을 활용할 수 있는 번역지원 툴, 전 세계의 번역사를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 원문과 똑같은 형태로 만들어내는 편집기술, SW 등이 현지어로 잘 구현될 수 있도록 만드는 엔지니어링 기술 등이 필수적이다. 이처럼 번역은 언어를 기반으로 하되 전문지식과 체계적인 시스템, 첨단 기술을 접합해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난도 높은 지식정보 산업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직 번역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거의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다. 제품 개발에는 많은 투자를 하면서도 이에 대한 제반 자료의 번역은 소홀히 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글로벌 대한민국을 향한 다각적인 노력에 박차를 가할 전망이다. 우리 기업도 전 세계로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더욱 치열한 경쟁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번역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국내에 산재한 8000여개 번역업체와 더불어 수출경쟁력 제고가 절실한 기업들, 관련기관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번역업계는 번역 품질이 우리의 수출경쟁력에 큰 변수가 된다는 점을 인지해 품질 제고 등에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 번역 소비자인 기업이나 관련 기관 역시 번역이 산업에 미치는 중요성을 인식해 현재 낙후돼 있고 외면당하는 번역업계가 하루빨리 성장하고 이로써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박희선 팬트랜스넷 대표 heesunp@pantran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