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을 울고 웃긴 세기적 연기자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되, 멀리에서 보면 희극”이라고 말한 바 있다. 최근 서울 한복판에서 근 3주간 지속되고 있는 촛불시위 역시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활력과 비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복합적 인생드라마의 전형으로 꼽을 만하다. ‘2002 월드컵’ 길거리 응원에서 발아한 참여형 시위는 미순·효순양 추모 시위에서 쇠파이프나 각목 대신 촛불로 새 단장한 후 최근의 쇠고기 수입반대 시위에서 다시금 감동과 분노의 양가적 반응을 초래하며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다.
수입 반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류는 광우병 감염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한다. 전통적으로 두려움은 기쁨, 슬픔, 분노 등과 더불어 인간의 생래적 감정 유형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유사한 생활 체험을 공유한 다수 국민이 광우병에 관해 상반된 견해를 토로하는 작금의 현실은 곧 공포에 소정의 정치성이 개재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가능하게 한다. 즉, 광우병 공포는 쇠고기 문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현 정국에 대한 인식적 격차가 보다 원천적 화근이라는 생각이다.
경제 성장에 골몰하던 60∼70년대 산업화 시대에는 생계를 위협하는 경제적 빈곤이 가장 큰 국민적 관심사였고, 철권 통치에 저항하던 80∼90년대 민주화 시기에는 정치적 억압이 척결해야 할 절박한 시대적 과제였다. 그러나 세계화·개방화가 촉진되는 금세기의 각축적 생활환경에서는 경력 불안정을 중심으로 한 사회불안이 새로운 공포의 진원으로 부각되고 있다.
사회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불안한 현대사회’라는 저서에서 현대적 불안의 3대 요인을 도구적 이성의 지배로 인한 생활목표의 상실, 도덕적 지평의 실종으로 인한 생활의미의 상실, 자유성이나 자결권의 약화로 인한 생활 역량의 상실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러나 오늘날 엘리트층을 제외한 대다수 한국인의 정서는 그러한 보편적 불안 의식의 수준을 초월한 심각한 상태로 치닫고 있다.
배고픔이라는 절대적 빈곤 상태를 맛본 장노년 세대들은 “노력하면 잘살 수 있다”는 성장 신화를 믿고 개발 위주의 경제 정책에 적극 호응해 왔으며, 그러한 관념과 행태는 성장세가 지속된 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지속돼 왔다. 그러나 유례 없는 경기 침체 및 구조조정의 고통을 안겨준 IMF 사태는 임금 생활자에게 고용 불안정, 임금 삭감, 승진 기회 축소 등을 강요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고난으로 사람들은 공적 영역에 대한 신뢰를 철회하고 사적 영역으로 침잠해 가족주의와 연고주의에 탐닉하게 됐으며, 특히 근로 외적 자산 격차의 확대에 대한 대중적 불만이나 좌절은 가진 자에 대한 부러움의 차원을 넘어선 적대적 집합의식을 조성,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의식적 단절 현상을 심화시켜 왔다.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은 동병상련의 타자를 필요로 한다. 음산한 외딴 곳에 갈 때 동반자를 찾거나 재해·재난지역에 상부상조의 봉사심이 발동하듯, 고조되는 사회불안은 공포의 공동체를 조성하는 정신적 기반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안전성에 관한 믿을 만한 객관적 데이터를 아무리 들여대도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객관적 진실이 아닌 ‘연대(being together)’가 바로 그들이 원하는 것인 까닭이다.
따라서 경색된 쇠고기 정국에 대한 해법으로 정부나 사회 각처에서 제시되는 소통 증진 방안은 기본적으로 올바른 진단이자 해결의 출발점이다. 특히 한국사회가 정보기기의 접근성 및 활용성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고 있음을 감안할 때, 정보기기에 내장된 소통 기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사회통합을 기할 수 있는 가능성은 활짝 열려 있다.
물론 지금 당장에는 ‘악플’이나 ‘도배’와 같은 부정적 행태들로 인해 디지털 공간이 저열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온라인 담화를 올바른 방향으로 향도할 수 있는 새로운 정보문화를 창출로 계층·지역·학력·세대 등을 초월한 진솔한 소통에 기반한 ‘사회적 공감대’를 구축할 수 있는 길이 주어져 있음을 확신한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muncho@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