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갑/하이닉스반도체 대표이사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당대 최고의 미래예측 전문가 중 한 사람인 피터 슈워츠의 고백이다. 슈워츠는 예측력을 높이기 위해 ‘시나리오 기법’이라는 연구방법론을 발전시켜 가고 있다. 시나리오 연구의 효시는 70년대 미래학자로 명성을 떨친 허만 칸 박사였고 나는 그가 생전에 설립한 허드슨연구소에서 그의 후학들과 함께 시나리오 연구에 참여한 적이 있다. 허만 칸 박사의 한국통일 관련 시나리오 연구가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귀중한 참고거리가 되고 있는 것을 보면, 미래도 고민하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보이나 보다.
미래예측 중에서 특히 경기예측은 어렵다. 경기(景氣)는 천기(天氣)라고도 하지 않던가. 똑같은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법은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경기는 순환한다는 사실이다. 확장국면이 있는가 하면 후퇴 및 수축국면이 있고 다음 순환으로 이어지는 회복국면이 뒤따른다. 문제는 경기 저점에서 다음 저점까지의 주기나 저점에서 고점까지의 진폭을 정확히 예측하기 쉽지 않은 데 있다. 산업혁명으로 공급초과가 발생하면서 경기순환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상이 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이클이 심하고 예측이 어려운 산업이 바로 반도체가 아닌가 싶다. 80년대에는 ‘올림픽 사이클’이라 하여 4년마다 치르는 올림픽 특수로 세계경제가 발전하고, 소비가전을 비롯한 전자산업 성장이 반도체 수요를 촉진하는 것으로 경기 순환과정을 설명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 더는 올림픽 사이클이 작동하지 않았고 PC를 위주로 MP3 플레이어, 휴대폰, 게임기 등 새로운 애플리케이션 출현이 반도체경기를 좌우하는 요인이 됐다.
한편, 지난해부터의 반도체 경기침체는 2004년에서 2006년까지 매출의 50∼64%나 되는 대규모 설비투자를 한 데서 온 공급초과가 근본 원인이다. 더욱이 작년 말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에서 오는 수요부진이 추가적인 영향을 줌으로써 연초 예상보다 회복이 지연될 것으로 보인다. 하이닉스를 비롯해 메모리 업계는 작년 중반까지만 해도 200㎜ 공장으로도 2010년까지는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었다. 그러나 D램 판가가 무려 85%나 하락한 나머지 이제는 모두가 서둘러 조업을 중단하고 300㎜로 옮겨가고 있다. 낸드플래시의 수요가 크게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에 따라 주요 기업들이 다투어 증설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계절적 성수기인 하반기에 들어와서도 수요가 크게 증가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다행스러운 것은 경기침체기를 맞으면서 선두 주자와 후발 주자 간 우열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수요가 증가하는 호황 국면에서는 기술력에 관계없이 거의 모든 메모리 기업이 20∼30%의 높은 영업이익을 기록했으나 이제는 거의 모두가 적자 상태다. 그런데 미세공정을 사용 여부와 프리미엄 제품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호황기에 비해 훨씬 더 큰 수익성 격차를 보이고 있다. 성장이 없는 정태적 산업에서는 경기순환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윤이 예상되고 따라서 치열한 경쟁이 있기에 기업은 생성-발전-위축-소멸로 이어지는 생명주기를 밟게 된다. 기술·원가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한 경기순환은 위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중요한 성장기회다. 선발기업군에 속하는 한국기업은 하강 국면을 오히려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후발기업군과의 격차를 더 벌리는 계기가 돼야 하는 것이다. 경기순환의 경험칙으로 보아, 골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높은 봉우리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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