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 시절 정통부의 한 알짜배기 산하기관장 인사가 화제를 모은 적이 있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기관장 공모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차관 혹은 차관급을 역임한 관료가 퇴임과 동시에 이동하던 자리였다. 추천위원회를 거쳐 정식 임명된 기관장은 민간인 출신이었지만 이력은 그에 못 미쳤다. 현직 고위관료에게 농을 던졌다. “민간 공모도 좋지만 체급이 안 맞는 것 같아요. 약체 기관장 소리 듣기 십상인데….” 대답 역시 조크로 돌아왔다. “그걸 노린 거지, 지금 당장 나갈 사람 마땅치 않은 판에 정부 통제 잘 따르고 언제든 갈아치우기 쉬운 인물을 선택해야지.” 결국 한바탕 웃음으로 마무리했다.
그로부터 정권이 두 번 바뀐 요즈음은 사정이 정반대가 됐다. 거의 모든 산하 기관장(공기업 사장) 선임은 공모제를 시행한다. 기관장의 임기도 법으로 정해 두었다. 게다가 새 정부는 기관장 인선에서 이전 정부 관료출신은 가급적 배제하겠다고까지 선언했다. 이런데도 잡음은 끊이지 않는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은 법정을 통해 저항하고 있다. 마구잡이식 꼴불견 개편도 눈에 띈다. 정치적 색채와는 전혀 거리가 먼 출연연까지 일괄 사표를 받았다. 한마디로 노무현 정부에서 임명된 모든 기관장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원칙도 없다. 새 정부 탄생에 기여한 인물이라면 이전 정부 출신 따지지 않는다. 경제 정책 실패 책임지고 물러난 인물도 한 달 만에 재기용한다. 회전문 인사, 보은 인사, 낙하산 인사에 ‘대리경질 인사’라는 단어까지 등장했다. 그래도 정부의 ‘일리 있는 궤변’은 그치지 않는다. “새 정부의 철학과 가치를 실행할 수 있는 인물을 수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견 맞는 논리긴 하지만 국민 눈에는 제 사람 심기와 대선 논공 행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압권은 따로 있다. 효율성을 내세우는 정부답게 신임 기관장들은 1년짜리 목숨이다. 해마다 경영계획을 체결하고 이행하지 못한 기관장은 곧바로 퇴출시킨다는 방침이다. 일을 하라는 것인지, 권부에 충성하고 눈치만 보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기관장 임명받고 조직 정비하고 본격적으로 실적 내려면 준비기간만 1년여가 소요된다. 민간기업도 3년은 보장한다. 기관장 자리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고용’이라는 ‘목숨’을 담보로 협박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이쯤되면 인사가 아니라 치졸함이다. 그 덕분일까. 새 정부 출범 이후 6개월 동안 한 일이라고는 인사뿐이다. 놀라운 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산자부 산하기관장의 경우 윤곽은 잡았지만 후속인사와 조직 통폐합이 기다린다. 출연연은 이제 시작이다. 이래저래 연말까지는 인사로 날을 지새울 판이다. 지금도 힘 빠져 뭐 하나 제대로 추진 못하는 정부인데 내년이면 ‘개혁’은 현실적으로 물 건너간다. 극과 극은 통한다. 적어도 인사에 관해서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행태는 일란성 쌍둥이다. 국민 안중에도 없고 기준이라고는 오직 내편이냐 아니냐뿐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네가 하면 불륜이란 독선적 우월의식이 깔려 있다.
민심을 업고 있는 대통령과 정부는 가장 강력한 권력이다. 민심을 잃은 대통령과 정부는, 그래서 법에만 의지하는 권력은, 작은 저항과 반발에도 허둥댈 수밖에 없다. 민심은 인사에서부터 표출된다. 인사가 별건가. 능력 있고 조직원이 수긍할 만한 사람 쓰면 그만이다. 간단한 이치 거스르고 내 입맛대로, 나 도와준 사람 앉히려니 파열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국민을 바보로 보는 바보들이 나라 운영의 주도세력이라면 비극이다.
이택 논설실장 ety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