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술이 발달하면서 아날로그 감성을 접목한 디지로그(digilog)가 각광을 받고 있다. 이미 2006년 미국 경제전문지인 ‘포브스’가 인류의 미래 삶을 변화시킬 열 가지 기술에 햅틱(haptic)을 선정할 정도로 디지로그는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한때 혁명으로까지 불리며 떠들썩하게 등장했던 디지털 기술이 그 부작용과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아날로그 감성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회는 하이테크화될수록 감성화되는 경향이 있다. 신기술이 출현하면 초기에는 기술이 사회발전을 견인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성숙기에 이르면 주도권이 소비자에게 넘어가 인간의 감성이 적극 발현되기 때문에 기술과 감성이 융합된 디지로그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21세기 들어 성공한 기업들을 봐도 신기술 개발에만 열을 올리기보다는 인간적인 가치를 디지털 기술로 잘 구현한 경우가 많았다.
이어령 교수도 그의 저서 ‘디지로그’에서 후기 정보사회의 선두주자로 디지로그를 꼽는다. 디지털 기술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아날로그가 보완함으로써 새로운 틈새의 영역을 장악해 사회, 문화, 산업 전반에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디지털만으로는 21세기를 지배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 반영된 것으로 가장 좋은 디지털이란 감성적이고 따뜻하며 인간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가상세계와 실제세계의 결합, 정보통신기술과 인간관계의 만남, 이성과 감성의 만남, 차가운 기술과 따뜻한 정(情)과 믿음이 만나는 디지로그의 삶이 균형 있고 조화로운 인간을 형성하기 위한 대안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이처럼 디지로그는 단순히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융합을 넘어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희망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디지로그 상품은 시장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셔터소리와 수동 기능을 장착한 디지털 카메라, 종이책과 전자책의 장점을 통합한 디지로그북 등은 차가운 디지털에 따스한 감성을 입힌 디지로그 제품이다.
휴대폰의 터치 스크린도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 상품이다. 시각과 청각뿐 아니라 촉각을 동시에 활용, 사용자가 휴대폰과 교감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도록 해줌으로써 감성을 자극한다. 집들이, 돌잔치 선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디지털 액자도 아날로그 감성이 돋보인다. 사진 파일을 저장해 놓고 슬라이드쇼를 설정하면 액자 속 LCD화면의 사진들이 순차적으로 바뀐다.
디지로그 현상은 눈에 보이는 제품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통신회사의 ‘사람을 향합니다’라는 캠페인이나, 네티즌이 매일 업데이트하는 포털사이트 지식인, 그리고 한국인의 독특한 사이문화에 기초한 싸이월드도 디지로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한국야구의 힘은 디지로그 현상의 결정판으로 불릴 만하다. 상대팀에 대한 철저한 데이터 분석에, 끈끈한 친화력에 기초한 선수와 코칭스태프 간의 믿음이 보태져 금메달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다.
우정사업본부도 디지로그 트렌드에 발맞춰 인터넷으로 편지를 쓰면 이를 출력해 집배원이 직접 배달해 주는 ‘인터넷 맞춤형 편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편지는 디지털 기술의 도움으로 썼지만 집배원이 아날로그로 배달하기 때문에 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축하나 감사, 사랑이나 우정 등을 표현할 때 전자우편보다 감수성을 자극할 수 있어 인기다.
앞으로 디지로그의 흐름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인간의 감성과 가치, 욕구를 담고 있지 않은 제품은 아무리 최첨단 디지털로 포장을 해도 시장에서 외면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개방, 공유, 참여로 대표되는 웹2.0 시대에서는 감성을 공략해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더구나 디지로그는 정치, 사회 리더십이나 기업의 매니지먼트, 스포츠 전략에까지 적용 영역을 빠르게 넓혀가고 있다. 시대를 이끄는 미래전략의 맨 앞장에 디지로그가 자리 잡을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정경원 지식경제부 우정사업본부장 kwjung@mke.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