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는 1980년대에 접어들어 산업구조가 급격히 고도화되면서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다. 값싼 인적자원에 의존하는 경제체질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자동화 기술, 로봇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한국은 생소한 로봇기술을 국산화하기 위해 이웃 일본이 거둔 눈부신 성과에 눈을 돌렸다. 일본은 이미 1966년에 닛산자동차가 산업용 로봇을 도입하면서 자동화 장비의 국산화를 이뤄서 1970년대 이후 산업용 로봇의 개발과 보급에서 세계 정상급에 올랐다. 발빠른 일본의 행보에 비해서 한국의 로봇 자동화는 한참 뒤졌다. 초기 로봇 국산화는 정부 지원이 거의 없이 산업계 및 학계의 자발적 노력으로 진행됐다.
현대차는 1978년 완공한 울산 제2공장에 일제 스폿용접용 로봇을 처음 도입했다. 이 땅에 로봇장비가 도입된 국내 최초의 사례였다. 현대차는 자동차 조립라인에 투입한 첨단 로봇팔에 복돌이, 복순이란 이름을 붙이고 회사에 큰 돈을 벌어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당시 수입한 로봇장비는 비싼 가격에 비해서 성능이 시원찮았다. 복잡한 로봇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인력도 회사 내부에 없었다. 툭 하면 고장이 나서 일본 기술자를 부르기 전까지는 생산라인을 멈춰야 했다. 조립현장에선 로봇이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기계라며 부정적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현대차가 로봇에 대한 인식을 바꾼 계기는 1980년대 중반 국산차 포니2의 미국 수출 때문이었다.
1985년 미국의 자동차 딜러들은 현대차 울산공장의 수작업 조립라인을 둘러보고는 따끔한 지적을 했다. 미국 시장에 발을 딛고 싶으면 로봇 자동화를 통한 자동차의 품질향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현대차는 서둘러 로봇 자동화 조립라인의 도입을 추진했다. 그룹 내 계열사들도 저마다 로봇사업을 하겠다고 나섰다. 정주영 회장은 사장단을 불러들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용접수요가 많은 조선소(현대중공업)가 로봇사업을 담당하는 게 좋겠다. 나머지 기업들은 전문인력을 한쪽에 몰아줘.”
‘왕 회장’의 교통정리로 현대중공업은 훗날 국내 최대의 로봇기업으로 자리 잡게 됐다.
비슷한 시기 대우중공업은 로봇 국산화에 획을 긋는 쾌거를 해냈다. 대우중공업 인천연구소는 1984년 6월 다관절형 아크용접 로봇 NOVA-10과 제어장치를 국산화했다. 하지만 로봇장비의 신뢰성 부족으로 결국 상용화에 실패하고 대우중공업은 일제 로봇의 수입판매로 돌아섰다. 국내 자동차 업계가 일제 로봇의 영향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은 95년 현대중공업이 다관절 로봇의 국산화에 성공한 이후다.
로봇자동화는 1980년대 후반 가전업계에도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삼성전자, 금성사 등은 세계 가전시장에서 일본의 아성에 도전하기 위해 로봇 자동화에 나섰다. 당시 일제 가전제품이 자랑하던 불량률 제로의 신화는 수작업이 아닌 로봇 자동화의 결과였다. 금성산전(현 LS산전)은 1986년 직교로봇의 개발을 시작해 금성사 평택공장의 VCR 제조라인에 투입했다. VCR는 다른 가전제품에 비해 수작업 조립공정이 많은 반면에 제품 무게는 가벼워 로봇 생산라인을 적용해 보니 성과가 좋았다. 금성사는 1990년대 초반부터 세탁기, TV 제조라인에도 자체 개발한 로봇장비를 본격적으로 설치됐다. 금성산전의 로봇사업부장을 맡았던 김정호 로보스타 사장은 “로봇조립라인을 도입한 이후 가전제품의 생산성이 3∼4배 높아지고 불량률이 급감했다. 국산 가전제품이 세계시장에서 싸구려 이미지를 벗어난 것은 로봇 국산화의 덕이 컸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금성사보다 한발 늦게 로봇 국산화에 나섰지만 더 괄목할 성과를 거뒀다. 삼성전자는 당시 국산 로봇장비의 고질적 약점인 잦은 고장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89년 국내 최초로 신뢰성이 확보된 SCARA타입 로봇을 개발했다. 삼성 경영진은 새로 제작된 국산 SCARA 로봇의 성능에 만족하고 전사적인 차원의 상용화 작업에 나섰다. 일부에선 국산 로봇의 성능을 믿을 수 없다면서 외산 로봇을 고집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삼성전자는 단시일 내에 로봇 양산체제를 갖추기 위해 로봇개발인력을 세 배로 늘리고 부품표준화를 서둘렀다. 그 결과 가전라인에서 작은 나사를 조이고 각종 부품을 적절한 위치에 주입하고 불량 여부를 자동으로 검사하는 머신비전 등 전자제품 공정에 맞는 로봇 애플리케이션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삼성전자가 그토록 갈망하던 일본 수준의 생산기술을 확보한 것이다.
1991년 삼성전자 구미공장의 VCR 라인이 100% 무인화체제로 들어갔다. 초기 44대의 로봇이 일사불란하게 VCR 데크를 조립하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삼성전자는 VCR 완전 자동화로 생산성을 5배로 증가시켰고 불량률은 절반 이상으로 감소했다. 또한 VCR 분야에서 20%가 넘는 원가절감 효과를 거뒀다. 사람 대신 로봇만 움직이는 가전제품 생산라인은 옐친 러시아 대통령을 비롯한 국빈들이 자주 방문을 하는 명소가 됐다.
한편 국내 대기업들은 민주화 열기로 노사분규가 극에 달하던 1987년을 전후해서 생산시설의 로봇자동화에 투자를 늘리기 시작했다. 당시 재계는 사람을 적게 쓰기 위해 로봇자동화가 꼭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인건비 상승과 품질 수준의 고급화를 충족시키려면 기업의 자동화 투자 외에는 대책이 없었다. 일부 대기업만 쓰던 산업용 로봇장비는 일차벤더로 확산되고 몇몇 중견기업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로봇장비의 국산화가 성과를 거두면서 외산 로봇업체들의 독점적 횡포도 크게 줄었다. 국산 로봇이 개발됐다는 소문이 퍼지면 외산 로봇딜러들이 가격을 갑자기 절반으로 내리는 사례도 속출했다. 비록 국산 로봇장비가 품질과 내구성에서 일제 로봇을 앞지르진 못해도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한국 로봇산업의 순조로운 성장세는 1990년대 후반에 급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주요 대기업들의 자동화 시설투자가 일단락되고 외환위기까지 터지자 로봇 자동화 분야에는 거센 찬바람이 불었다. 대기업에서 로봇 전문인력들이 빠져나와 뿔뿔이 흩어졌다. 로봇기술은 국내 전자산업의 체질 향상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로봇산업 자체는 그다지 수익성 있는 형태로 성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1980년대 로봇 분야에서 쌓은 국산화 노력이 오늘날 반도체, LCD 산업의 발전에 중요한 지렛대로 작용했음은 다시 조명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