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인적 네트워크에 좌우되는 국제 표준회의

[ET단상]인적 네트워크에 좌우되는 국제 표준회의

 국가 간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국제회의에서는 국력이나 기술력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인 인적 네트워크가 위력을 발휘한다. 회의를 주재하거나 다양한 네트워크를 가진 국가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기도 한다.

 얼마 전 국제 표준회의에 참석해 웃지 못할 촌극을 경험했다. 내가 참석한 날 국제표준 회의장에는 공용으로 사용할 전문 용어를 놓고 지루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국제 표준회의는 일반적으로 영어·프랑스어와 러시아어가 공식 언어로 사용된다. 최근에는 신속을 기하기 위해 영어만 사용하는 회의가 많아졌다. 이번 회의도 러시아 대표가 양보해 영어만 사용하기로 합의됐다. 영어가 국제 공용어가 돼 가고 있다지만 그래도 아직은 많은 참석자에게 쉽지만은 않은 언어다. 따라서 통상 미국이나 영국 대표가 회의를 주도하는데 그날 따라 유난히 태국 대표가 자기 주장을 강하게 펼쳤다.

 가까스로 용어의 정의가 끝나고 분임조가 만든 국제표준화기구(ISO) 규격 초안이 상정됐다. 제1분임조의 작업 결과 보고는 일본 대표가 맡았다. 일본인 특유의 액센트가 귀에 거슬렸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는다. 아마도 전날 일본 측이 제공한 성대한 만찬에 모두 만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몇 번 발표를 하고 나면 유력한 차기 작업반 반장으로 거론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일본 대표는 매우 만족해 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5개국 대표가 이틀간의 각고 끝에 작업한 결과가 함량 미달이었다. 회의 종료 후 별도의 작업반을 만들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가져가고자 하는 의도가 명백했다. 갑자기 태국 대표가 별도 작업반을 만들어 심층 검토하자는 제안을 했다. 발표를 맡았던 일본 대표는 안도하는 눈치였다. 결국 별도의 작업반에서 검토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제2분임조 작업 결과 발표는 미국 대표가 맡았다. 제1분임조에 비해 상당히 모양을 갖추었으나 유럽과 미국에 편향된 내용이었다. 응당 일본에서 이견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의외로 조용했다. 둘 사이에 모종의 협약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안 되겠다 싶어 한국 대표가 발언을 신청했다. 한국 대표의 이견이 제시되자 캐나다인 의장은 또 다른 의견을 구했다. 영국과 이스라엘도 잇따라 초안에 찬성하는 발언을 했다.

 “한국 측 대표가 제안한 의견도 매우 흥미롭지만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초안을 수용하는 것으로 합시다.”

 올해 나이 70세인 캐나다인 의장은 카리스마가 넘친다. 그가 내린 결론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고립을 자초하는 길이다. 한국 대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일본 대표를 힐난하듯 쳐다보았다.

 그때 태국 대표가 발언을 신청했다. 뜬금없이 차기 회의를 태국에서 개최하고 싶다는 요지의 발언을 장황하게 한다. 사실 차기 회의 논의는 마지막 의제인데 돌출 발언을 한 것이다. 그러나 태국 대표가 회의 진행에 많이 협조해온 공을 인정한 듯 의장은 각국의 의견을 물었다. 일본을 비롯해 여기저기서 찬성 발언이 나왔다. 태국은 최근 관광 진흥을 위해 국제회의 유치에 힘을 쏟고 있는 중이다. 잽싸게 차기 회의 개최지를 차지한 태국 대표는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회의는 종결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 한국 대표에게 태국 대표가 한마디 위로의 말을 건넸다.

 “미스터 김, 의장이 당신을 기억하고, 이름을 불러 준 것을 축하합니다. 이제는 당신도 이 회의에 버젓한 멤버가 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음 회의에는 당신의 의견을 좀 더 진지하게 들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것 같았던 그날 회의에서 일종의 소득이라면 한국 대표의 존재감을 심어줬다는 것과 이를 통해 다음 회의에서 더 큰 성과를 올릴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합리성으로 점철될 것 같은 국제회의도 결국 인적 네트워크가 결정적으로 작용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황만한 한국표준협회 산업표준본부장 mhhwang@ks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