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증시가 신용 위기로 혼란에 빠진 가운데 마이크로소프트(MS)·HP 등 대형 정보기술(IT) 업체들이 자사주를 대대적으로 사들이고 있다. 23일 MS는 향후 5년간 총 400억달러(약 46조2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올해 자사주 매입 규모 중 가장 큰 규모다. 특히 MS는 자사주 매입을 위해 33년 역사상 처음으로 20억∼60억달러의 기업어음(CP)도 발행키로 했다.
이날 HP도 80억달러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하겠다고 밝혔다. 이 회사는 이미 지난 2년간 비슷한 규모의 자사주를 사들인 바 있어 상당한 양의 자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에 앞서 올 초에는 IBM이 150억달러 규모의 자사주 매입을 공표했다.
MS의 계획 발표 이후 스탠더드&푸어스는 회사 신용 평가 등급을 최고 등급인 AAA로 올렸다. MS가 AAA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MS 주가는 연초 대비 20% 가량 내려앉았으며, 자사주 매입 발표 이후에는 소폭(1%) 올랐다.
류현정기자 dreamshot@
◆ 뉴스의 눈
왜 IT 대장주들이 자사주 매집에 나서는 것일까. 특히 현금이 넘쳐나기로 유명한 MS가 은행에 돈까지 빌려가며 자사주 매입에 우리 돈 46조원을 퍼붓기로 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일단 IT 기업들이 대규모로 자사주를 사들인 것은 넘쳐나는 현금 보유 비중을 적정수준으로 줄이고 자산별 균형을 맞추기 위한 돌파구로 해석된다. 경제 침체와 금융 위기 속에서 MS, IBM, HP 등 IT 대장주들은 매달 쌓이는 현금의 적당한 용처를 찾지 못해 고민해왔다. MS의 경우, 지난 6월 30일 기준으로 당장 꺼내 쓸 수 있는 현금만 237억달러에 달한다. 그린위치 아메리칸테크놀러지리서치 애널리스트는 “투자자들은 현금 보유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며 MS에 수차례 경고해 왔다”고 말했다.
또 자사주 매입은 기업 운용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다. IT기업들은 현재 금융 위기와 주가 폭락은 기술주들의 기초 체력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자사주 매입을 통해 투자자들에게 설명한 것이다.
미국 당국의 금융 규제 완화와 낮은 이자율도 IT기업들의 재무 전략으로 자사주 매입이 떠오른 배경이 됐다. AP에 따르면, 이자율이 2% 안팎으로 낮은 상태에서 MS와 같은 회사는 대출해 자사주를 매입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득이다. 대출 이자금은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분위기는 당분간 IT 분야에 인수합병(M&A)할 업체가 없고 투자할 사업도 찾기 힘들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MS는 올 초부터 야후를 475억달러에 M&A하기 위해 팽팽한 줄다리기에 나섰으나 수포로 돌아가자, 자사주 매입으로 투자 전략을 선회했다. 크리스 리델 CFO도 “야후 인수 실패의 대안으로 주식(MS) 매수를 고려했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당분간 IT기업들은 자사주 매입과 같은 보수적인 현금 운용을 보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구글 에릭 슈미트 CEO는 이같은 조류에 대해 “자사주를 사들이거나 대출하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그것은 뉴욕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면서 M&A나 신규 투자를 더 선호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구글 역시 129억달러의 엄청난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