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은행이 지난 10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중소기업 유동성 지원에 나서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11월 7일 현재 13개 시중은행을 거쳐 145개사에 2890억원을 지원했다고 한다. 글로벌 경제위기 여파로 중소기업이 심각한 자금조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와 은행이 중소기업 지원에 나서고 있는 것은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 ‘내 코가 석 자’라는 표현이 있다. 현재 국내 은행의 처지를 잘 표현해주는 것 같다. 정부뿐만 아니라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중소기업에 자금을 지원하라고 해도 시중 은행은 자체 유동성 문제로 중소기업을 지원할 여력이 없다고 한다.
중소기업중앙회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94.7%가 유동성 지원을 위한 정부 대응이 신속하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또 최근 정부의 대책에 지원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응답한 업체는 2.7%에 불과했다. 중소기업이 이렇게 정부의 지원대책을 두고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정부의 다양한 대책에도 은행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지 않을 것이며, 정부 정책의 효과가 현장에 미치기까지는 장기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업들이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은 은행과 보증기관이 추가 담보를 요구하거나 이미 발생한 대지급금의 정산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는 담보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에는 자금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름없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중소기업은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서를 제출해도 은행에서 대출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는 KIKO와 관련해서도 은행은 중소기업에 일방적인 피해 감수를 요구하고 있다. 소송을 제기한 기업에는 소송 포기를 강요하거나 유동성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은행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행태가 은행 본점의 결정이 아니라면 일선 지점에서 기업에 가하는 압력일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각 은행은 본점 차원에서 일선 지점에 분명한 지침을 하달하고 이행실태를 수시로 점검해야 할 것이며, 금융감독 당국 및 공정거래위원회도 이런 일로 민원이 발생하면 명확히 시비를 가려줘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은행은 KIKO 판매와 관련해서 전혀 과실이 없다고 한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법정에서 당당하게 입증하면 될 것이다. 소송 문제를 기업의 유동성 지원과 연계해 기업에 압력을 가하거나 지원을 기피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은행도 기업의 자금난 해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유동성 지원이 조속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중소기업은 머지않아 IMF 외환 위기보다 심한 대량 연쇄도산 상황에 이를 수 도 있다. 중소기업 도산은 은행의 부실로 이어지고 이는 곧 국가경제 부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은행이 자발적으로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야 한다. 지난 10월 22일 시중 은행장들은 내년 6월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중소기업 대출에 만기를 연장하고 중소기업 금융애로를 해소하겠다고 결의까지 했다.
금융업은 본질적으로 사적 이익 추구는 물론이고 공익적 성격이 내재돼 있다. 이러한 금융 위기 시 은행이 원활한 자금순환 역할을 해준다면 은행의 존재 이유를 다시 한번 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이 있다. 오늘의 소나기 피하기식의 임시방편 대응보다는 내일을 위해 멀리 보는 혜안을 은행에 기대한다.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 kimkm@kbiz.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