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팹리스 업체가 시스템반도체 생산물량을 외국 파운드리에 맡기는 일이 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올해 SoC 시제품 개발 지원사업에 참여한 팹리스 업체 24개 신개발품 가운데 해외에서 초기 생산한 곳이 13건(54.1%)이나 됐다. 이는 2006년의 20%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이고 매년 이 비중이 커지고 있다. 정부 지원을 받아 제품을 개발한 국내 팹리스 업체가 이처럼 국내보다 해외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것은 여러 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우선 외화 유출이 걱정된다.
그러나 이보다는 패키징·테스트 같은 국내 후공정 반도체 산업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다. 실제로 국내 팹리스 업체가 잇달아 외국 파운드리에 생산을 맡김에 따라 국내 중견 패키징·테스트 기업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또 설계부터 소자·제작·패키징·테스트 등으로 이어지는 반도체 산업의 연결고리도 취약해져 전체 반도체 산업의 기형 구조를 부추기고 있다. 한 중견 패키징 기업은 “기술로만 보면 국내 기업이 대만 파운드리보다 훨씬 낫다”면서 “그런데도 팹리스 업체가 국내 업체보다는 해외 파운드리를 선호하고 있다”며 상황의 심각성을 전했다.
사실 이 같은 현상은 애초 이 사업을 전개한 정부의 뜻과도 배치된다. 정부가 ‘SoC 시제품 개발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는 것은 반도체 중 반도체라 불리는 SoC 개발은 물론이고 후방산업인 패키징과 테스트 산업 육성도 고려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사업 공고를 낼 때에도 SoC 시제품 개발과 함께 후반부 설계, 파운드리, 패키지 회사와의 긴밀한 협력 체계를 강조하고 있다. 물론 국내 팹리스 업체가 해외 파운드리를 선호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우선 아주 미세한 공정을 가진 파운드리는 삼성전자가 유일한데 삼성이 물량이 작다는 이유로 지원에 미온적이어서 불가피 하게 해외로 나가고 있다. 실제로 삼성은 이런 이유로 이 사업과 관련된 팹리스 기업의 시스템반도체 개발 지원을 지난해 한 건도 하지 않았으며 올해도 1건에 그치고 있다. 국내 파운드리 이용료가 대만보다 30% 정도 비싼 것도 이유가 되고 있다. 비록 정부가 시제품 개발 소요 비용을 최고 50%까지 지원한다고 해도 한 기업당 평균 1억원 정도밖에 되지 않아 0.13㎛ 국내 공정을 이용할 때 드는 평균 5억∼6억원에 비하면 크게 부족하다.
결국 팹리스 업체 쪽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우수한 라인을 사용하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팹리스와 파운드리 업체가 저마다의 사정을 내세워 이처럼 협력하지 않음에 따라 국내 반도체산업의 숙원인 시스템반도체 강국 실현이 점점 더 멀어진다는 사실이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만 우리는 세계 최강일 뿐 정작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이보다 비중이 훨씬 더 큰 시스템반도체 분야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세계 시장 점유율은 미미하고 수입의존도도 높다.
이 때문에 정부는 전략적 기술 개발, 국제협력 강화 등을 통해 오는 2015년까지 세계 시스템반도체 시장 10% 달성을 목표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튼실한 시스템반도체 생태계 조성에 도움이 안 되는 이번 팹리스 업체의 해외 생산 엑소더스를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