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깊을수록 1등 기업만 산다

 ‘장기불황에 2위는 없다. 1위만 생존할 뿐이다.’

불황의 골이 깊어지면서 1위 기업이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는 현상이 정보기술(IT) 업계에 나타나고 있다고 포브스가 분석했다. 지난 11월 추수감사절 다음날 전세계 PC업계 1위인 HP는 델보다 5배나 많은 PC를 팔았다. 이른바 ‘블랙프라이데이’라 불리는 미국 최대 쇼핑 기간에 델이 참패를 한 것. 지난 2006년 HP에 1위 자리를 내준 델은 경기 침체가 거듭할수록 격차를 좁히기는커녕 더 벌어지고 있다.

PC 프로세서 제조업체인 1, 2위인 인텔과 AMD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주문량 급감으로 두 회사 모두 매출 전망치를 낮췄지만, AMD의 타격은 더 크다. 인텔의 올해 순이익 규모는 20억달러정도지만, AMD는 이미 약 6700만달러의 순손실을 기록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인텔의 독주를 경계하는 것은 2위인 AMD가 아니라, 시장의 독점을 감시하는 미국 법무부다.

불황이 찾아오면서 M&A 소용돌이에 빠졌던 마이크로소프트(MS)와 야후의 입장도 180도 달라졌다. 올 초 MS는 주당 프리미엄 62%를 얹어 야후를 사겠다고 정중히 의사를 밝혔고 야후는 가격이 낮다며 거부했다. 불황이 장기화되자, 야후는 MS에 회사를 사달라고 간청해야 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제리 양 야후 CEO는 MS에 회사를 매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퇴진했다.

장기 불황기에 1위 업체의 지배력이 더 강화되는 이유는 대체로 3가지로 꼽힌다. 먼저, 가격 경쟁력이다. 불황기 소비자들은 디자인 등 비가격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싼값에 좋은 제품을 고르는데 혈안이 돼 있다. HP는 브랜드 인지도 측면에서는 델과 비슷하지만, 같은 기능의 PC를 좀더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다. PC 부품을 저렴하게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소비 심리가 위축되면, 모험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검증된 ‘안전한’ 제품을 선택하려고 하기 때문에 1위 기업의 시장점유율은 더 높아진다.

1위 기업이 현금까지 많이 보유하고 있다면, 호황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선택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 싼값에 기술력 있는 기업을 입맛대로 골라 매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스코와 애플은 단기 현금성 자산이 각각 268억달러, 245억달러에 이른다. 포브스는 막강한 현금 동원력을 보유한 두 업체가 향후 M&A 시장에 큰 손이 될 수 있으며 산업 구도를 재편할 수 있는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류현정기자 dreamsho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