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채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10년 만에 극적으로 컴백했다. 그의 복귀는 한 편의 드라마다.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관료로 승승장구하다 ‘PCS 사건’으로 옷을 벗었다. 그 후 기나 긴 법정 투쟁, 결국 그는 무죄판결을 받아냈고 명예를 회복했다. 10년간의 야인 생활로 그의 이름은 잊혀졌다. 간간히 그를 기억한 것은 정통부 관료들과의 술자리에서였다. 이제는 장차관을 거쳐 외직에 몸담고 있거나 산하 기관장으로 나가 있는 정통부 고위관료들의 입에서 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관이 누구냐”는 질문에 ‘이석채’가 압도적이었다. 물론 이 전 장관은 당시 야인이었다. “많이 깨지기도 했지만 가장 많이 배웠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체신부를, 경제부처 정통부로 변화시킨 정체성 전환의 주역이라는 것이다. 경제관료로서 그의 시각과 정책접근 방법이 당시의 정통부 후배 공무원들에게는 충격이었고 그들은 기꺼이 스펀지가 돼 정체성 재확립에 나섰다. 이후 정통부는 한국 경제의 성장동력기관으로 자리 매김했다. 그처럼 추억의 저편에 머물던 이석채씨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KT 사장 자리에 귀환했다.
이제 관심은 온통 그의 행보에 쏠려 있다. 자연스럽게 10년 전 한국통신이 오버랩된다. 당시 사장은 정통부 차관을 역임한 이계철씨였다. YS정권 말기에 임명돼 정권 교체 후 엄청난 외풍에 시달렸지만 조직의 환골탈태를 이루어냈다. 합리성과 효율성을 멀리하는 독점 국영기업이 처음으로 시장 경쟁체제라는 냉혹한 환경에 내몰리던 때였다. 이 사장은 조달 인사부문을 대대적으로 수술했다. 6만5000명이 넘었던 인력 규모도 4만8000명 수준으로 무자비하게 줄였다. 경쟁력 취약 부문을 매각하고 히트상품, 성장엔진 찾기에 전력을 기울였다. 땅 짚고 헤엄치던 유선전화는 이동전화의 등장에 비틀거렸다. 1998년 매출은 8조7700억원, 당기순익은 2800억원이었다. 조직과 사업 리모델링을 마치자마자 다행히 초고속인터넷이라는 엔진을 발굴했다. 매출과 이익이 상승곡선을 그렸다. 2000년에 드디어 이익 1조원 클럽에 가입했다. 2002년 이상철 사장 시절에는 매출 12조6000억원에 순익 1조880억원이라는 절정의 기록을 맛보았다. 이계철 사장의 기초 위에 이상철 사장이 전략적 성장 드라이브에 성공, 마침내 KT의 전성기가 열린 것이다. 이후 KT는 안간힘의 연속이었다. 성숙 포화시장에서 쇠락해가는 방어선 지키기에도 힘에 부쳤다. 이용경, 남중수 사장이 바통을 이어 받았지만 외형 12조원은 아직 ‘마의 벽’으로 남았고 순익도 1조5000억원대에서 게걸음이다. SK텔레콤에 업계 맏형자리까지 내줘야 할 판이다. 그래도 ’선방’이라는 목소리 탓에 경영능력을 의심받지는 않았다.
모두들 ‘이석채 KT’에 신성장 엔진과 KTF 합병을 요구한다. 정체와 퇴보의 조직은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결조건이 있다. 사업 모델 다시 세우고 전략 짜는 것만큼이나 문화를 바꾸는 일이 시급하다. 여전한 파벌적, 분열적 편가르기, 상대방 흠집 내기와 줄서기 문화가 잔존한다면 ‘천하의 이석채’라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것이다. 벌써부터 실세는 누구며, 누구는 학연 지연으로 엮여 있고 누구는 퇴출 대상이라는 등의 온갖 설이 떠돈다. 10년 전 한국통신은 독점의 온실에서 경쟁의 시장으로 나오는 혹독한 시련을 이겨냈다. 10년이 흐른 ‘이석채 KT’는 미래 비전을 달성할 새로운 조직문화의 정착이 첫 시험대가 될 것이다.
이 택 논설실장 ety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