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반도체포럼: 시스템과 팹리스 간 기업 생태계 활성화 방안 좌담회
참석자 : 경종민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 민정기 삼성전자 상무, 양준철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근부회장, 오수영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부문장, 오세현 SK텔레콤 사장, 유인경 LG전자기술원장, 허염 실리콘마이터스 사장, 황기수 코아로직 사장<가나다 순>.
사회 : 신화수 전자신문 부국장(신성장산업부장)
<편집자주 : 우리나라 메모리반도체 산업은 부동의 세계 1위다. 그러나 이보다 시장 규모가 몇 배나 더 크고 성장세도 꾸준한 시스템반도체 산업은 여전히 취약하다. 풀어야 할 과제가 수두룩하지만 산업 생태계부터 만드는 게 급선무다. 이른바 ‘세트’업체로 불리는 시스템 기업과 ‘팹리스’로 대표되는 시스템반도체업체의 상호 협력 모델이다. 이러한 취지로 전자신문은 시스템-반도체포럼과 공동으로 신년 좌담회를 개최했다. 시스템-반도체포럼은 ‘2015년에 세계 시스템반도체 시장의 10% 점유를 달성한다’는 포부로 시스템 기업과 시스템반도체 업계의 최고 전문가들이 지난해 10월 29일 결성했다. 좌담회에 참석한 포럼 멤버들은 시스템 기업과 반도체기업의 협력만이 ‘제2의 반도체 신화’를 만들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사회(신화수 전자신문 부국장)=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현실부터 살펴보자. 우리 팹리스기업의 경쟁력 수준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유인경(LG전자기술원장)=LG전자는 시스템반도체를 대부분 ‘아웃소싱’한다. 연간 1조원 정도 구매하는데 국내 팹리스 제품의 비중은 10%에 그친다. 그것도 대체로 주변 기능에 초점을 맞춘 제품이다. 퀄컴의 통신칩과 같은 메인 칩에 완전히 통합하기 전까지 ‘한시적인 역할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중소 업체의 솔루션이라면 특허 침해 걱정도 하는 게 사실이다. 남의 기술을 베낀 칩을 사다 써도 세트업체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팹리스업체들은 칩 솔루션과 소프트웨어(SW)에 취약한 편이다.
◇황기수(코아로직 사장)=우리 팹리스산업의 역사는 10여년이다. 규모가 큰 SW·플랫폼에 솔루션을 제공할 힘이 달린다. 그래도 SW 의존도가 낮은 칩에선 경쟁력이 있다. LDI·CIS·멀티미디어 SoC 등이 대표적이다. 퀄컴 같은 글로벌 시스템반도체 기업이 칩 하나로 SW를 일괄 공급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글로벌 경쟁력을 갖기란 쉽지 않다. 대기업과 팹리스 기업이 힘을 합쳐 경쟁력 있는 칩을 만들어야 한다.
◇사회=우리나라엔 대만과 달리 강력한 파운드리(위탁생산)업체가 없어 팹리스업체의 발목을 잡는다. 해결책은 없는가.
◇허염(실리콘마이터스 사장)=위탁생산도 두 갈래로 볼 수 있다. 우선 대만의 TSMC처럼 첨단공정을 적용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미 감가상각한 팹을 활용하는 것이다. 디지털 SoC가 첨단 공정을 적용해야 한다면, 멤스(MEMS)는 감가상각한 팹을 쓸 수 있다. 삼성전자 시스템LSI의 12인치 팹에선 전략적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동부하이텍이나 매그나칩의 팹은 아날로그나 특화 제품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최근 하이닉스가 팹을 많이 정리했다. 굉장히 아깝다. 일부 투자를 더해 공정을 특화하면 위탁생산 사업의 수익성을 얻을 수 있다. 위탁생산이 발전하려면 ‘규모의 경제’를 이뤄야 한다. 이게 안 되면 공정개발이 부담스럽다. 우리도 협력과 합병으로 TSMC와 같은 ‘규모의 경제’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미국의 큰 회사들은 요즘 시설 투자를 꺼린다. 좋은 위탁생산 기업이 있으면 그곳에 맡긴다. 인텔을 뺀 대부분이 이렇게 한다. 우리도 위탁생산산업에 성장 기회가 있다. 전략적으로 키운다면 클 수 있는 산업이다.
◇민정기(삼성전자 상무)=팹리스 상위 10개 기업의 연간 누적 매출이 대만의 미디어텍이나 미국 마벨의 1년 매출도 안 된다. ‘왜 대만과 미국 업체들이 강할까’ 생각해봤다. 공통점이 있다. 두 나라 업체 간 정보교류가 활발하다. 중화권의 인맥 네트워크가 좋다. 또 대만이나 미국 업체는 글로벌화돼 있다.
이에 비해 우리 팹리스는 국내 시장만 본다. 성장하려면 글로벌화해야 한다. 위탁생산 서비스에 앞서 팹리스업체들이 첨단 공정 제품을 쓸 수 있는 여건을 갖췄는지도 생각해볼 문제다. 사실 8인치 팹으로도 큰 문제는 없다. 동부하이텍과 매그나칩이 있다. ‘12인치 팹을 돌릴 만한 제품을 우리 팹리스 기업들이 개발할 수 있나’라는 의문도 솔직히 든다. 우리 팹리스 기업들도 협력이나 합병을 통해 규모를 키워야 한다.
우리가 새로운 첨단 공정을 개발하는 데 1000억원 이상 든다. 양산 투자까지 포함하면 천문학적인 돈이다. 팹리스업체가 첨단공정을 쓰면 개발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에 수익이 안 좋을 수 있다. 제품 개발을 위해 팹리스업체도 ‘규모의 경제’를 키워야 한다. 첨단공정을 안 쓰더라도 패키지 기술로 얼마든지 양질의 제품개발이 가능하다.
◇허염=디지털 SoC 위주의 12인치 팹은 재원이 없으면 할 수 없다. 삼성전자가 한다면 가능성 있다. 노후한 8인치 팹엔 대형 플레이어가 없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임베디드메모리가 강하다. 빨리 제휴해 하이닉스의 8인치 팹을 이용하면 우리가 세계를 이끌 수 있다. 미국 회사들도 더 이상 팹을 안 짓는다. 상당히 좋은 시기다. 경기가 어려워지면 투자도 안 한다. 이럴 때 이 분야를 우리나라가 잘하면 리드할 수 있다.
◇유인경=세트 기업의 입장에선 메인칩을 고르고 여기에 덧붙일 솔루션을 찾는다. 이 솔루션을 국내에서 고르지만 메인칩을 원칩화할 때까지 한시적일 뿐이다. 그렇다면 토털 SoC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 팹리스에 그럴 능력이 있을지 의문이다. 공정도 필요하고, 개발비도 많이 든다. 시스템 기업이 적극적으로 검토해 채택하는 것도 중요하다. 삼성이나 LG도 자체적으로 칩세트를 해보지만 아직 성공적이지 않다.
◇황기수=규모의 경제를 보자면 궁극적으로 우리 팹리스업체도 퀄컴이나 TI처럼 커야 한다. 국내 팹리스 상위 10개사를 합쳐도 10억달러가 안 된다. 그런데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선 지금까지 제대로 된 투자가 없었다. 코아로직도 처음에 70만달러를 투자받았다. 실리콘마이터스는 500만달러의 투자를 실리콘밸리에서 유치했다. 우리 팹리스업체엔 자본이 거의 투입되지 않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이 정도까지 성장한 것도 대단하다. 지금부터 자본시장이, 그리고 대기업이 도와줘야 한다.
◇허염=자본시장이 굉장히 중요하다. 기업들이 필요에 의해 합병하려면 주식시장이 뒷받침돼야 한다. 우리 코스닥을 보면 회사가치가 말도 아니다. 코스닥을 정상화시키지 않으면 우리나라 팹리스업체의 인수합병(M&A)은 힘들다. 미국 퀄컴은 IP를 개발한 작은 회사를 M&A한다. 이 과정에서 현금으로 안 되니 주식스와프를 한다. 우리도 M&A가 활성화되려면 주식시장이 건전하고 제도적으로 뒷받침이 돼야 한다. 지금은 모두 자력으로 한다.
◇황기수=대만 팹리스업체가 성장한 것은 결국 TSMC나 UMC 같은 회사들이 투자한 덕분이다. 구심점이 있어 거대자본을 가진 회사들이 작은 팹리스업체에 투자하면서 IP 개발도 시키고, M&A도 했다. 웨이퍼 값도 대줬다. 자연스럽게 기업 생태계를 형성했다. 우리나라에선 큰 회사는 큰 회사끼리, 작은 회사는 작은 회사끼리 거래해 팹리스 산업이 크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겐 생태계가 없다.
◇사회=시스템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많은 노력이 있었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와 실패 사례는 뭔가.
◇경종민(KAIST 교수)=잘못한 점 세 가지와 잘한 점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잘못한 점은, 우리 정부가 독불장군을 많이 만든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과학자들은 노벨상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의지는 좋지만 이를 위한 작업이 지속적으로 추진이 되는지 의문이다. 산업 생태계엔 여러 연결 고리가 있다. 임베디드 SW가 중요하다. 휴대폰을 개발할 때에도 SW개발 비중이 70∼80%다. 그런데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없다. IP 벤더도 없고, 파운드리도 없다. 이러한 요소들이 제대로 크지 못해 시스템과 연결이 안 됐다.
두 번째는 펀더멘털을 무시하고 근시안적인, 인기 영합주의가 문제다. 산업은 굉장히 빨리 움직여야 하지만 학교나 정부, 연구소까지 빨리 가는 건 문제가 있다. 펀더멘털이 취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만과 비교해 인적자원과 플랫폼이 현저하게 뒤처졌다. 대만에선 SoC 설계인력이 될 석사가 1년에 2000명 정도 졸업한다. 우리는 그냥 석사 500명이 졸업한다. 대만에선 400명의 SoC 설계 교수를 채용하는 작업을 5년 전에 끝냈다. 대만은 자체 생태계를 조성했다. 홍콩과 중국도 가세했다. 우리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격차는 더 커질 것이다.
세 번째 문제는 기획과 평가 체계가 미흡하다는 점이다. 로드맵도 잘 안 됐다. 나도 국내에서 손꼽히는 설계전문가인데, 우리나라 반도체설계 로드맵을 만드는 데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다. 기획과 평가를 제대로 하려면 전문적인 능력과 투명성, 그리고 제대로 일할 수 있는 물적 지원이 필요하다.
잘한 점도 있다. HDTV 칩을 삼성, LG, 대우, 현대 4개사가 개발한 것이다. 이 작업을 10년 정도 했는데 음으로 양으로 각 회사들이 TV 개발에 유용했다. 후반부 5년간의 ASIC 기술과제를 학교가 맡았다. 기업이 학교에 보여주면서 시대에 맞는 연구를 하라고 가르쳐줬다. 그런 정신이 상당히 좋았다. 두 번째는 지∼1995년 산업 기반을 구축했다는 점이다. 어떤 아이템 하나보다 인프라 구축과 인력 양성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플랫폼(세트)을 중심으로 시스템-반도체 포럼이 발족했다는 점이다.(전체 웃음) 좋은 시도라고 평가한다.
◇오수영(ETRI 부문장)=미국 시스템반도체는 컴퓨터 산업을 따라 발전했다. 일본 시스템반도체는 가전에 맞춰, 우리는 휴대폰과 함께 각각 발전했다. 우리 휴대폰 제조업체들은 잘하는데 주변 칩만 하고 메인 칩을 하지 못했다. ETRI가 CDMA칩을 개발해 삼성에 넘겼지만 제대로 상용화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상용화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잘하는 게 휴대폰, 내비게이션, 셋톱박스 등이다. 시스템 기업과 팹리스업체가 협력하면 분명히 기회가 있다. 기존에 있는 제품을 개발하는 건 어렵다. 새로운 제품을 만들 때 시스템과 팹리스업체가 공동 보조를 맞춰야 한다.
◇사회=시스템반도체는 진입 장벽이 높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팹리스산업을 키우려면 시스템 기업의 지원이 절대적이다. 시스템 기업이 팹리스에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오세현(SK텔레콤 사장)=우리나라 통신 인프라는 세계에서 가장 앞섰다. 무선인터넷 서비스도 세계 최초, 최고를 기록했다. 이 분야에선 팹리스업체든, 시스템업체든 성장 기반이 있다. 그런데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2000년대 초반 벨소리 다운로드 서비스가 나왔다. 이 서비스가 급성장할 것이라고 우리 같은 서비스사업자도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이때 음원 칩을 일본 업체가 만들었다.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시스템 기업과 반도체 기업은 몰랐다. 최근엔 시스템 기업들도 서비스 로드맵을 준비해 제품을 가져간다. 올해 우리는 소음제거 폰을 내놓았다. 여기에 필요한 기술을 찾던 중에 IP를 가진 회사를 발굴했다. 국내 휴대폰 업체에도 제공했다. 그런데 그 기술을 퀄컴이 인수했다.
DMB도 아시다시피 우리나라가 앞선다. 지상파 DMB는 1000만대의 휴대폰에 보급됐다. 위성 DMB를 먼저 시작했는데 보급이 많이 안 됐다. 위성 DMB 단말기 칩이 비싸기 때문이다. 칩이 비싸니 단말기 제조사가 채택하지 않는다. 우리는 가격을 낮출 수 있는 통합칩을 준비한다. 이런 게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까 생태계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서비스사업자, 시스템 기업, 팹리스 기업이 따로 갔다. 이를 엮을 생태계가 필요하다. 서비스사업자도 로드맵을 발굴하는 게 중요하다. 시스템 기업이 시스템 반도체나 IP개발에 함께 참여해야 한다.
◇황기수=좋은 칩은 시스템회사와 반도체회사가 같이 개발할 때 나온다. 반도체기업들은 IP를 가지고, 시스템 기업은 ‘테스트베드’ 역할을 해, 생기는 문제를 피드백해야 한다. 독자 개발은 더 이상 안 된다. 코아로직과 엠텍비젼도 초기 카메라폰이 나올 때 삼성, LG와 공동 개발했다. 서로 ‘윈윈’하는 관계에서 카메라폰을 해외에 대량 수출해 지금의 성공 토대를 마련했다.
씨앤에스테크놀로지는 최근 자동차에 들어가는 모바일TV 등을 현대기아차와 공동, 개발한다. 자동차가 전장화하는 데 허브로 팹리스 기업을 육성하는 것이다. 시스템 기업도 지금은 협력의 필요성을 느낀다. 서로 협력 모델 만들지 못하면 공멸한다.
◇민정기=플랫폼 기반으로 하려면 우리 팹리스들이 기술적으로 따라와줘야 가능하다. TSMC, UMC와 같은 대만 파운드리 기업은 공정기술과 생산능력, IP를 제공한다. 이 외엔 팹리스가 다 한다. 우리 팹리스업체들도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 시스템 회사와 협력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다.
◇사회=정부가 시스템반도체 산업을 적극 육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정부도 동의한다. 정부가 어떻게 지원해야 하는가. 가장 먼저 할일은 무엇인가.
◇양준철(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우리 팹리스는 매출이나 자본 모두 열악하다. 이를 어떻게 키우는지가 고민인데 전략적 제휴나 M&A로 키울 수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에겐 이런 풍토가 없다.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최근 해외엔 M&A 사례가 많은데 국내에서도 이런 틀이 빨리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정부는 고급인력 양성과 연구개발(R&D)을 더욱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우리는 TDX나 D램, HDTV 칩을 독자 개발해 성공했다. 이런 성공 사례가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도 나와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이런 국가적인 프로젝트가 거의 없었다.
시스템회사와 반도체회사가 서로 역량을 모아야 한다. 반도체 회사가 기껏 개발해도 시스템회사가 써주지 않으면 쓸모없다. 연구개발 단계에서 시스템 기업과 팹리스가 협력하고, 대학이나 연구소가 좋은 인력을 제공해야 한다. ‘팹리스-시스템 기업-대학’이 합쳐진 클러스터도 생각할 수 있다. 어떤 분야일지 좀 더 논의를 거쳐야 하겠지만. 정부가 클러스터에 R&D 자금을 제공하고 대기업도 비용을 분담하는 모델도 가능하다.
◇오수영=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다. 조금은 태생적인 문제다. 우리 팹리스 기업 CEO들은 대부분 삼성·LG·ETRI 출신이다. 반면에 대만 팹리스 CEO들은 미국에서 사업을 하다 돌아왔다. 미국 시스템 기업의 화교들과 대만 팹리스 기업들이 중국의 시장과 함께 연결됐을 때 굉장히 파괴력이 있다.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두려워한다. 글로벌 인적 네트워크 구축도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갖고 있고, 가져와야 할 시장이 결코 작지 않다.
정리=설성인기자 siseol@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