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게 자신의 차기작을 신뢰를 갖고 기다리는 독자가 있다는 사실은 참 행복한 일이다. 더욱이 그 독자가 ‘바람의 나라’를 쓴 김진 작가라면 말이다.
대다수 만화가는 연재 중에는 다른 작품을 읽지 않는다. 김진 작가도 마찬가지. 하지만 바람의 나라 집필이 한창일 때 막내 동생이 고(故) 고우영 화백의 새 작품 시리즈를 샀다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바로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작품이 바로 ‘십팔사략’이다.
김 작가가 일상적인 행동의 틀을 깰 만큼 고우영 화백은 그에게 믿음을 주는 작가였다.
고우영 화백의 어떤 점이 김 작가에게 무한한 신뢰를 주었을까. 김 작가는 “작가와 작품이 일치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십팔사략 역시 어릴 적부터 봐온 고우영 화백의 작품이어서 설렘보다는 “다음이 어떠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봤다고 한다. 작품 연재 중이었지만 이미 완성된 작가 고 화백의 작품이었기에 어떤 영향을 받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는 특히 ‘십팔사략’ 1권에서 황허문명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장면 중 ‘저기가 배달이야’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고우영 화백의 진면모를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우리 민족의 시각에서 남의 역사를 훑는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잖아요. 중국사를 이야기하셨지만 고우영 선생님의 마음 속에는 항상 그 중심이 존재하셨던 것이고, 독자도 그것을 느끼는 것이지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것 역시 김 작가가 꼽은 고우영 화백의 미덕이다.
십팔사략 역시 국내에는 고우영 화백이 처음 소개했지만 그 속에 담긴 사실이 틀릴지 다른 책을 찾아보거나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김 작가는 “역사적 사실은 훼손돼서는 안 되는데 재미만 좇아서 판타지 조금, 역사적 사실 조금 섞어 보여주면 독자가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은 결국 독자를 깔보는 것”이라며 “고 선생님 작품을 볼 때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그만큼 진중하게 이야기 해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역사 속 수많은 캐릭터를 하나하나 생동감 있게 그려낸 것은 고 화백이 ‘그림의 달인’이기 때문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그는 작가가 된 후 처음 고우영 화백을 만난 순간을 잊지 못했다. 무크지 ‘뭐’의 창간호에 실을 선배 작가들의 사인을 받기 위해 찾아간 화실. 거기에서 동료 작가들과 화투놀이를 하는 모습에서 “만화가면 그런 모습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고우영 선생님이 거기에 계셨다”고 회상했다.
고우영 선생이 그립지 않으냐는 어리석은 질문에 김 작가는 “여기 다 살아계시는데, 이게 다 고 선생님인데…”라며 15년이 된 십팔사략을 넘기며 읊조리듯 말했다.
김진 작가는 고우영 화백을 “만화계가 받은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고 화백이 아픈 중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한 것은 원고료나 무엇을 바라서가 아니라 독자에게 선물을 하나 더 주기 위해서였다는 게 김 작가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는 그 선물에 지금도 한없이 감사하고 있었다.
이수운기자 per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