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2월 초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시스템온칩(SoC) 관련 세계 최고 학회인 국제반도체회로학술회의(ISSCC)가 개최되고 있다. 나는 20여년 전부터 이 학회에 참가해오면서 세계 SoC의 흐름과 현장 분위기를 피부로 직접 느끼곤 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컴퓨터가 핵심 산업이었다. HP가 있는 팰러앨토와 애플 본사 주변에는 중소기업이 몰려 컴퓨터 주변기기 및 이에 필요한 칩(IC)을 개발하는 데 한창이었다. 인텔 CPU와 한국·일본의 D램이 컴퓨터 흥행에 큰 요소여서 당시 486 CPU나 256M D램 등의 신기술이 ISSCC에서 발표됐다. 이러한 칩이 내장된 컴퓨터가 출시돼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곤 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는 휴대폰과 인터넷 산업이 실리콘밸리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휴대폰용 RF 칩과 고속 인터넷 전송칩 및 네트워킹용 칩을 개발하는 회사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반도체 칩에 대한 사용자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기 휴대폰에 어떤 칩이 들어있는지 알려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게 됐다. 단지 전화가 잘 되는지, 인터넷 속도가 빠른지 등에만 관심을 보였다.
최근 활기를 띠는 분야는 바이오·의료 분야인 것 같다. 실리콘밸리의 변두리에서 적은 인원이 조그만 사무실을 빌려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모습에서 그 옛날 실리콘밸리의 창업 열기가 아직도 남아 있음을 느꼈다.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은 1980년대 중반에 본격적으로 시작, 컴퓨터산업이 한창이던 1990년대 초반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 휴대폰 산업이 본격화될 무렵 D램에서 세계 최고의 제조·생산기술을 인정받았으며 이를 현재까지 유지해 오고 있다. 시스템반도체는 199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시작, 첨단 기술 분야보다는 양산성을 확보할 수 있는 분야인 8비트 CPU, LCD 드라이버 IC 및 CMOS 이미지센서 등으로 발전해오고 있다. 새로운 기술의 발견이나 발명에서부터 응용 연구, 제품 연구 및 산업화로 연결되는 흐름에서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두각을 보였다. 하지만 새로운 발명이나 응용제품 연구에서는 여전히 취약, 미국 실리콘 밸리를 멀찌감치 뒤에서 따르고 있다.
우리도 새로운 발명이나 응용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최첨단 기술에 대한 인식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신기술은 다른 나라에서 구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시행착오와 좌절 속에서 우리 스스로가 찾아내야 한다. ‘기술은 사방에 있고 돈만 있으면 사서 더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논리는 최첨단 산업에서 통하지 않는다. 정부는 대학·벤처·중소기업과 대기업을 체계적으로 연결할 필요가 있다. 대학은 신기술을 발명하고 벤처는 응용연구를 하며, 중소기업은 상품화하고, 대기업은 세계 시장을 공략하는 체계다. 금융위기 영향을 반도체도 피해갈 수는 없다. 이런 불경기에는 더욱 더 큰 뜻을 품고 기술 에코시스템을 구축, 과감하게 최첨단 신기술에 도전해 세계적인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
유회준 KAIST 전자전산학부 교수·국제반도체회로학술회의(ISSCC) 극동지역 부위원장 hjyoo@ee.ka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