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있지만 문화는 없다.’
우리나라 게임 산업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온라인게임 및 모바일게임 업체가 있고 게임에 대해 깊은 애정을 품은 이용자도 많지만 게임 산업의 평가가 절하되고 역기능이 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게임 문화는 단지 이용자 문제가 아니다. 게임 업체는 물론이고 정부의 정책도 연관돼 있다. 최근 불거진 두 가지 사례를 중심으로 게임 문화의 부재와 그 악영향을 진단해본다.
◇즐거움의 수단에서 인생의 목적으로 전락한 게임=최근 서울 삼성동 엔씨소프트 사옥 1층에서는 시끄러운 소동이 자주 벌어진다. 엔씨소프트가 불법 프로그램 사용을 이유로 4만개가 넘는 리니지 계정을 압류하면서 생긴 결과다. 계정을 뺏긴 이용자들은 원상복구를 주장한다.
이들은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한 건 인정하지만 예고도 없이 계정을 없애는 조치는 가혹하다”며 선처를 요구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자동사냥 프로그램 사용자들을 방조하다가 갑자기 단속을 강화하는 모습은 잘못됐다”는 논리를 펴기도 한다. 몇몇 과격파(?)는 “엔씨소프트가 오히려 불법 프로그램 사용을 조장했기 때문에 이번 계정 압류는 즉각 철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일그러진 국내 게임 이용 문화의 단면이다. 모 게임 업체 대표는 “게임은 일상의 즐거움을 얻는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곤란하다”며 “게임에 빠져서 자신의 그릇된 행위를 인정하지 못하는 게 현재 리니지 계정 압류에서 나타나는 소동의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엔씨소프트의 반론도 간단하다. 엔씨소프트는 “자동사냥 프로그램을 근절하겠다는 우리의 원칙은 단호하다”며 “그동안 자동사냥 프로그램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는 지적은 겸허히 받아들이지만 이로 인해 그 원칙이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게임 업계 전문가들은 ‘국가가 부패했다고 해서 현행법 위반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이유를 들어 엔씨소프트의 계정 압류를 지지하는 분위기다. 특히 연간 100억원에 달하는 금전적 손실을 보면서까지 강행한 계정 압류는 용기 있는 결정이라는 게 중론이다.
이처럼 게임이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전락하는 사례는 리니지뿐만이 아니다. 청소년이 자주하는 온라인게임들은 이미 게임머니나 아이템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따돌림을 서슴지 않는 왜곡된 문화가 만연해 있다.
◇시대착오적 게임 문화의 전형 셧다운제=게임 문화의 저급함은 정부 정책 속에서도 나타난다. 그 대표적 사례가 현재 정부 여당이 추진하는 청소년보호법 내에 들어 있는 셧다운제다.
셧다운제는 밤 12시부터 아침 6시까지 청소년은 온라인게임을 이용할 수 없도록 강제하는 제도다. 보건복지가족부와 한나라당 등은 “청소년이 지나치게 온라인게임에 빠져 부작용이 심각하다”며 “특히 성장기 청소년에게 적정한 수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이유로 셧다운제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에 대해 상당수의 학부모는 찬성을 표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셧다운제가 득보다 실이 많다고 평가한다. 규제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아날로그적 사고며 가정에서 해야 할 역할을 국가가 자임하는 시대역행 발상이라는 지적이다.
이인화 이화여대 교수(디지털미디어학부)는 “청소년을 앞세워 아날로그 시대의 잣대로 디지털 시대를 억압하는 악법”이라며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늘 이와 같은 구시대적 규제가 나왔는데 앞으로 정보민주화 침해와 검열 강화로 이어질까 우려된다”고 꼬집었다.
게임의 대중화를 이끌어낸 세계적 게임 개발자 미야모토 시게루 닌텐도 개발본부장 역시 “게임의 중독성은 분명하지만 이를 조절하는 역할은 국가가 아닌 가정의 몫”이라며 “만일 한국에서 셧다운제가 실시되더라도 최대한 짧게 유지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