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칼럼] 악플, 아주 오래된 경멸의 이야기

[ET칼럼] 악플, 아주 오래된 경멸의 이야기

 기원전 430년 즈음의 얘기다. 소크라테스가 어느 날 시장에 갔다가 형편없는 사람에게 모욕을 당했다. 이를 본 어느 행인이 “그렇게 욕을 듣고도 괜찮냐”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되레 반문한다. “안 괜찮으면? 당나귀가 나를 걷어찼다고 내가 화를 내야 옳겠소?” 모욕에 대처하는 현자(賢者)의 의연함과 자신감을 보여준다.

얼마 전 노라조라는 2인조 음악그룹이 악플에 대처하는 방법이 화제가 됐다. “얘들 쓰레기 아니냐”는 악플에 “1집 때는 사무실에서 거의 쓰레기 대접 받았습니다”라고 응수하고 “립싱크하려면 때려치워”라는 비난에 “저희끼리 입을 못 맞춰 립싱크를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받아친다. 악플을 가벼운 농담으로 만들어버린 재치가 유쾌하다. 악플 하나하나에 정색하고 대응했다면 상처만 커졌을 게 뻔하다.

정부와 여당이 ‘정색’을 하고 악성 댓글을 뿌리 뽑겠다고 나섰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형법상 모욕죄가 있는데 굳이 ‘사이버’라는 틀을 덧붙여 새로운 법을 만들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악플은 인터넷에서 발생했지만 인터넷만의 현상이 아니다. 경멸과 모욕에 관한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소크라테스와 노라조 그룹 사이에는 2400여년의 간극이 있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프랑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의 저서 ‘불안’을 보면 경멸의 역사는 매우 길다. 심각성도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다. 13세기부터 19세기까지 경멸과 모욕을 둘러싼 결투로 유럽에서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17세기 스페인에서만 무려 5000명이 죽었다. 1834년 독일에서는 자신의 콧수염을 조롱당한 육군 장교가 결투를 신청해 결국 둘 다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친구끼리 술자리에서 무시하는 말을 주고받다 끔찍한 사건으로 이어졌다는 요즘 뉴스와 다를 바 없다.

경멸과 모욕은 남을 낮추고 깔봄으로써 자기를 높이려는 왜곡된 사회심리적 행동이다. 내면에 인정받고 싶은 욕망,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깔려 있다. 경멸의 역사에 인터넷이 개입하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속도와 방식이다.

전체 악플의 절반가량을 5%에 불과한 소수의 악플러가 도배로 채운다는 최근 한 조사 결과가 있다. 뒤집어보면 대부분의 네티즌은 좋은 댓글이나 혹은 그저그런 댓글을 다는 셈이다. 소수의 악플러를 막자고 다수의 평범한 이용자를 위축시키는 규제는 바람직하지 않다. 사이버스토킹과 같은 심각한 악플러를 현행 법으로 강하게 규제하면 될 뿐이다.

인터넷 악플의 80∼90%는 이른바 공인이라는 연예인과 정치인에 집중돼 있다. 공인이라고 악플이 달가울 리 없지만 공인인만큼 악플에 좀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더욱이 공인은 힘없는 일반 네티즌과 달리 언제든 기자회견을 열어 해명하고, 여론에 호소하고, 심지어 사법적인 접근도 쉽게 할 수 있는 힘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경멸과 모욕은 사회가 존재하는 한 근절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 사회의 해결방식과 수용태도다. 좀 더 야만적인 시절엔 결투와 죽음으로 해결했지만 성숙한 사회에선 보다 합리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인터넷 시대의 경멸과 모욕에 관한 사회적 합의는 현재진행형이다. 강한 규제와 처벌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조인혜 미래기술연구센터(ETRC) 팀장 ih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