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주목받던 신인 만화가 양영순은 술을 마시고 찾은 선배의 작업실에서 만화책 한 권을 발견했다. 오락가락하는 정신으로 뒤적거리던 책에 빠져 어느 틈에 끝까지 읽게 됐고 ‘술이 확 깰 정도로 정신이 번쩍 드는 충격’을 받았다. 2년차 작가 양영순의 마음속에는 “나도 이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
양영순 작가(39)는 1997년 박흥용 작가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가슴을 울리는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데뷔 전에 일본 만화를 많이 봤는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같은 감동은 없었어요. 나도 연륜과 실력이 쌓인다면 이런 느낌이 나는 작품을 그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처음 본 순간 신선한 충격이 퇴색될까 양 작가는 그 이후로 다시 작품을 읽지 않았다. 하지만 12년 전 단 한 번 읽은 작품의 몇몇 장면을 그는 가슴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양 작가는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 경지에 이른다는 게 정말 묘했다”며 장님인 황 처사가 항아리 안에 갇혀 자라다 소리를 통해 세상을 보기 시작하는 부분을 가장 기억나는 장면으로 꼽았다.
그는 주인공의 이름이 견자(犬子)라는 데서는 서민적인 정감을 느꼈고, 주인공이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박흥용 작가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오히려 황 처사와 비슷한 것 같다고 말하자 “작가는 자기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자아를 꺼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조금씩 닮은 부분이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그림체는 투박하다. 주인공이라고 해도 특별히 예쁘거나 잘생기지도 않았다.
양영순 작가는 그 투박함에 대해서 “청국장 같은 스타일이죠?”라고 반문하며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더 섹시하고, 예쁜 게 불필요하다고 판단을 내리신 것 같다”고 풀이했다.
양 작가가 박흥용 작가를 처음 만난 건 이현세 화백의 ‘천국의 신화’가 청소년보호법 위반으로 재판이 벌어질 때 만화가들이 모인 자리에서였다. 그는 “무림의 고수 같은 느낌이었는데, 현실감은 없었다”고 첫인상을 이야기했다.
양영순 작가에게 선배 박흥용 작가는 벽과 같은 존재다. 다른 선배 작가의 작품에서 재미를 느끼고, 다양한 생각의 고리를 발견한다면 박 작가의 작품에서는 “부딪쳐 보고 싶은 벽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이상한 이야기 같지만 한 번 덤벼보고 싶다는 투지가 갑자기 생기기도 해요.”
그는 작년쯤 어딘가 꽉 막혀 있다는 느낌이 들어 자문하려 박흥용 작가를 찾았다. 협회나 모임이 아닌 개인적인 만남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양 작가의 고민을 들은 박흥용 작가가 그에게 성경과 영화 한 편을 선물해줬는데, 그는 그 영화를 보고 “그 경지까지 가기는 멀구나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선배 작가와 비교해 “절대적인 부족함을 느낀다”는 양영순 작가. 그는 “박 선생님이 그 작품을 하셨을 때가 서른 다섯 살이었는데 제가 지금 서른 아홉 살이라고 생각하니 또 화가 나려 한다”고 말을 맺었다.
이수운기자 per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