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경기에 남들은 푼돈까지 챙기느라 바쁘다는데, 유독 오라클만은 유유히 ‘쇼핑’을 즐긴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세계 최대 기업용 소프트웨어업체 오라클은 기업들의 실적이 본격적으로 나빠진 지난해 10개 소프트웨어업체를 인수했다. 오라클은 올 들어서도 최근 엠발렌트(mValent)라는 회사를 또 인수하며 왕성한 ‘식욕’을 자랑했다.
2003년 래리 엘리슨 오라클 회장이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 합병해야 할 것”이라고 선포한 이후 시작된 오라클의 기업 쇼핑은 불황에도 멈출 줄 모른다. 벤처 소프트웨어업체들도 꽁꽁 얼어붙은 나스닥 대신 오라클의 문을 두드릴 정도다.
◇오라클의 이유있는 쇼핑 중독=오라클의 현금 동원력은 최근 더욱 위력을 발하고 있다. 매년 20%씩 성장한 결과로 74억달러에 달하는 현금을 쌓아두고 있다. 게다가 최근 매물로 나온 기업의 가치는 형편없다. 시장에 공개돼 거래 중인 기업의 가격은 전년 대비 30% 떨어졌다. 아직 공개하지 않은 사기업의 가치는 50%까지 내려앉았다.
지난 4일 오라클에 인수된 엠발렌트는 잘나가는 유망 소프트웨어업체였지만, 리먼브러더스와 서킷시티 등 주 거래처가 파산하면서 직격탄을 맞았고, 오라클은 ‘바겐 세일’ 제품을 고르듯이 기업을 샀다. 소니 싱어 오라클 최고거래책임자조차도 “내가 만약 저 회사였다면 끝까지 버텼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매수 적기라는 데는 다른 기업의 임원들도 동의하는 분위기다. 존 체임버스 시스코 회장은 “현금(Cash)이 왕이요, 여왕이요, 로열 패밀리다”라고 했으며 마이크로소프트의 크리스 리델 임원도 “인수 기회로 더 이상 좋을 수 없다”고 했다.
◇창업 소프트웨어업체 “오라클 IPO 노려라”=이제 오라클은 ‘제2의 IPO 시장’으로 부상했다. 주식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나스닥이나 뉴욕 증시를 통한 IPO 기회는 사실상 실종됐기 때문이다. 사모펀드 투자도 최대 80%까지 줄어들면서 여전히 쇼핑을 즐기는 오라클은 벤처 소프트웨어업체들의 원금 회수 창구 역할을 한다.
2007년 오라클에 바로사라는 회사를 매각한 존 피서는 “오라클은 새로운 IPO다”라고 말했다. 오라클은 규모가 작은 기업도 인수한다. 매출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지만, 미끼 상품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레이 왕 포레스터 연구원은 “오라클은 많은 업체를 인수했기 때문에 고객에게 더 많은 틈새 상품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더 이상 매수할 업체가 없다”=부러움을 사고 있는 오라클의 고민은 3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먼저 인수 대상업체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오라클은 2004년 피플소프트, 2005년 시벨, 2007년 하이페리온, 2008년 BEA 등을 각각 33억∼103억달러를 주고 인수했다.
그러나 지난해 인수한 업체 금액을 다 합쳐도 7억5000만달러 수준이다. 소규모 업체까지 싹쓸이 인수하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애널리스트는 오라클의 매출이 20%씩 성장하는데 M&A가 큰 역할을 했지만, 이 역시도 한계에 부딪혔다고 분석했다.
다양한 업체를 인수하다 보니 영업에 혼선이 빚어지는 것도 오라클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된다. 또 최근엔 마이크로소프트가 저가를 무기로 오라클의 핵심 역량인 ‘데이터베이스’ 분야로 침투하는 점도 오라클의 새로운 고민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류현정기자 dreamsho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