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를 좋아해 고시까지 떨어졌다’는 농담이 나올 만큼 만화를 좋아하는 아버지와 일본에서 온 친구들 덕에 어지간한 국내외 만화는 다 섭렵하던 유소년 시절. 그 수많은 만화 중에서도 청소년기 최훈 작가를 사로잡은 것은 이현세 만화였다.
그중에서도 ‘지옥의 링’은 ‘링은 나에게 지옥이었다’는 마지막 대사를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할 만큼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줬다.
지난 10일 경기도 용인시 자택에서 만난 최훈 작가(38)는 “마지막 장면에서 엄지를 향한 까치의 사랑이 한꺼번에 전해져 오는데, 충격이고 감동이었다”며 ‘지옥의 링’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지옥의 링’을 읽은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다니던 독서실 앞에 있던 만화대본소.
“그때도 이현세 선생님 작품을 읽으려고 가서 둘러보는데 지옥의 링이 있더라고요. ‘어 이현세 거네’ 하면서 그냥 이렇게 보는데, 주제나 소재도 그렇지만 마지막 반전이 정말 충격이었어요.”
그 이후 그 작품을 다시 보지는 못했지만 최 작가는 라커룸 검은 침대에서 까치가 누워 엄지에게 ‘링이 지옥이었다’고 고백하는 마지막 장면과 대사를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최훈 작가가 지옥의 링의 미덕으로 꼽는 부분은 만화의 사실성을 최대한 살렸다는 점이다. 현실 속에서는 끝내기 만루홈런이 종종 나오지만 스포츠 만화 속에서는 번트에 스퀴즈, 도루를 해서 겨우 점수를 내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처럼 만화의 리얼리티는 현실과는 다르다는 설명이다.
“작품을 보면 현실 속에서는 말도 안 되는 요소들이 많지만 마지막 부분에 가면 설명이 되니까요. 이래서 주인공이 참아냈구나 하고 이해가 되잖아요.”
여기에 스포츠 만화로서 ‘지옥의 링’이 기존의 스포츠 만화가 답습하던 여러 가지 틀을 깼기 때문에 남달랐다고 부연했다.
대부분의 스포츠 만화는 재능은 있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한 주인공이 재능을 발견하고 성공해가는 이야기 구조를 가졌지만 ‘지옥의 링’의 주인공인 까치는 어떤 재능도 없는 주인공이다.
“주인공이 재능이 없다는 것 자체도 신선했지만, 재능이 없는 상태에서는 기대하는 드라마가 나오기 어렵거든요. 그런데 지옥의 링에는 두 번의 반전이 있어요. 재능이라곤 찾아 보려야 볼 수 없는 주인공, 아무것도 없는 주인공이 엄지에 대한 일념 하나로 그걸 참아냈다는 거죠.”
만화적 사실성을 추구하는 방식은 최훈 작가가 이후 작품을 하면서 만화 속의 리얼리티를 살리는 방법을 추구하는 데 반영이 됐다고 한다.
그는 지옥의 링뿐만 아니라 ‘고독한 영웅들’을 보면서 “이현세 선생님은 특이한 소재를 떡주무르듯 주무르는 데는 선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말했다.
작가가 된 후 이러저러한 모임에서 이현세 작가를 마주할 일이 있었지만 “신이 아니라 인간을 대하는 게 두려워” 만남이 오히려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어느 날 절친한 곽백수 작가와 함께 이현세 작가를 만났을 때도 자신은 말 몇 마디 하지 못하고 곽 작가 혼자서 이야기를 거의 다 했다고 털어놨다.
스포츠 만화를 그리면서 ‘지옥의 링’ 같은 작품이 욕심 나지는 않을까. 최훈 작가는 “잘할 수 있는 것과 잘하고 싶은 것이 따로 있는 것 같다”며 “잘 그릴 수 있는 것에 충실하고, 좋은 만화를 보면서 기뻐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이수운기자 pero@etnews.co.kr
<최훈 작가는?>
대학 3학년이던 1997년 문학계간지 버전업에 ‘I even kill the dead’로 소설가로 먼저 등단했다. IMF 이후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 일본으로 4년간 만화유학을 떠났다 2002년 일간스포츠에 ‘하대리’를 연재하면서 만화가로 자리 매김한다. 2004년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MLB카툰’을 실은 것을 시작으로 만화코너가 아닌 스포츠 코너에 ‘최훈 카툰’을 연재 중이다.
<지옥의 링은?>
‘공포의 외인구단’ ‘제왕’과 함께 1980년대 이현세를 대표하는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의 만화의 주인공인 엄지와 혜성(까치)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지방 보육원에서 자란 혜성과 엄지는 엄지가 양부모를 만나 보육원을 떠나면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고,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소질도 없지만 권투를 시작한다. 비극적인 결말이 인상적인 이 작품은 1987년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현재 권투 대신 K1으로 소재를 바꿔 한일합작 드라마를 제작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