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불황이 러시아만 비켜갈 리 없다. 지난 10년 동안 매년 7%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며 경제대국으로 변모해 가던 러시아였지만 최근에 세계적인 경제 불황에 제대로 된서리를 맞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인해 지난 5개월간 러시아 재계순위 25위까지 입은 손실이 무려 2300억달러에 달한다. 더불어 지난해 5월 이후 러시아의 RTS 지표(RTSI)는 71%나 하락했다. 재벌들은 그간 소유한 회사의 지분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왔지만 보유 사업체의 주가가 대폭락하면서 극심한 자금압박을 받고 있다.
◇러시아 국영기업 10년 만에 처음 디폴트 선언=최근 러시아 국영 항공기 금융 리스업체인 ‘파이낸스리싱코(FLC)’가 지난해 12월 2억5000만달러 규모의 외채에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던졌다.
러시아 국영기업이 외채 디폴트를 선언한 것은 지난 1998년 ‘루블화 위기’ 이후 10년 만에 처음으로 투자자들의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다.
미그기를 생산하는 국영 유나이티드에어크래프트의 금융 자회사인 FLC는 러시아 정부가 지분의 90%를 보유하고 있다.
이번 디폴트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해외 투자자들은 러시아 정부가 더 많은 기업의 디폴트를 방관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러시아 정부가 올해 초 기업들의 외채 상환을 돕기 위해 마련하려던 500억달러 규모의 기금이 백지화되고 외환보유고도 30% 이상 급감하는 등 악재가 잇따르고 있다.
◇고통받는 러시아 서민=경제상황이 어려우면 국가나 재벌, 기업보다 현실적으로 더 피해를 보는 것이 영세한 사업체와 월급 생활자다.
이는 러시아라고 예외가 아니다. 현재 경제불황으로 일거리를 잃은 러시아 여성들이 사창가로 몰린다는 유력 일간지의 기사가 나오고 있고, 실업자 수가 무려 1000만명에 육박한다는 통계자료도 발표되는 실정이다.
러시아 서민경제와 관련해서는 인플레이션을 예견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현재 러시아 루블화의 가치는 나날이 치솟는 중이다. 최근 몇 년간 세계 물가지수 1위를 수년째 고수하고 있는 수도 모스크바는 그간 경제 성장과 더불어 오른 물가였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았지만 최근 끝이 안 보이는 경제 불황의 늪 속에 빠지면서 당장 서민경제를 거론할 때마다 문제의 중심에 서게 됐다.
지난 2월 말 모스크바 의회 경제분과 위원장인 이고리 안토노프 의원은 2009년 말 모스크바 소비재의 가격이 작년 대비 35%나 오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더불어 이러한 인플레이션 현상이 2011년까지 지속되리라는 전망도 동시에 언급했다. 이 말이 실현된다면 모스크바 시민에게는 재앙이 도래하는 셈이다.
◇디플레이션 빠진 부동산 시장=더불어 현재 모스크바 부동산 시장에서는 반대로 디플레이션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모스크바의 아파트 가격은 작년 대비 평균 70% 이상의 하락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다소 기이한 현상도 보인다. 모스크바 지역에 지어진 아파트의 최저가와 최고가의 차이가 무려 440배에 달한다.
모스크바의 아파트 중에 최저 매물은 약 7만5000달러 수준에서 구매가 가능한 것에 비해 모스크바 중심가에 있는 부자들을 위해 지어진 고급 아파트는 무려 3300만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물론 이 초고가 아파트는 현재는 입주자를 찾지 못해 비어 있는 실정이다.
과거 같았으면 재벌들 중에 누군가가 상징적으로나마 부를 과시하기 위해 구입했을 법한 이 아파트는 경제 불황으로 인해 선뜻 구매를 희망하는 주인을 못 찾고 있다.
이 아파트는 지난해 여름만 하더라도 4500만달러였는데 6개월 사이 1200만달러나 가격이 떨어진 것이다.
◇텅 빈 거리 광고판=광고 업계, 특히 거리 보드 광고 업계에도 이런 불황의 징후가 심심치 않게 드러나고 있다. 러시아 도시의 대로 중심에 예외 없이 세워져 있는 보드 광고는 한때 경제활황과 더불어 꽤 많은 성장을 거듭한 부문이었지만, 현재는 광고주가 급감하면서 광고 없이 비어 있는 곳이 상당수 보인다.
이에 보드 광고 업계에서 묘안을 짜낸 것이 기업광고나 물품에 대한 광고가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이 광고 보드를 상당부분 개방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가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비해 단가를 대폭 낮췄다는 것이 달라진 점이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러시아 도시에서 기업광고가 아닌 개인들의 광고가 눈에 많이 띈다.
◇모라토리엄 방지 위한 강력한 경제 정책=물론 옐친 대통령 당시의 모라토리엄 같은 위기는 재발되지 않는다는 것이 러시아 경제 전문가 대부분의 관측이다.
이는 푸틴 총리의 강력한 경제 정책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러시아는 국가 차원의 예산 절감 방안을 추진 중이다. 눈에 띄게 손을 대고 있는 부분은 2020년까지 현재 편성되고 있는 국방비의 30%가량을 줄이는 입법 추진이다.
더불어 경제부양 정책에 심혈을 기울이는 중이다. 이번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러시아 국가의 재도약을 위한 발판이 될지 아니면 국가 경제에 크나큰 타격으로 남을지 확실히 전망할 수는 없겠지만 그간 다소 방만했던 경제 분야를 다잡는 기회가 될 것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모스크바(러시아)=손요한 블루비즈 기획실장 yohan.s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