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기술적으로 눈물 쏙 뽑아내는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지만 작가의 진실성이 보이는 작품이 있습니다. 천일야화에서는 양영순이 인간의 어디에 중심을 두고자 했는지 알겠더라고요.”
지난 29일 신사동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윤태호 작가는 양영순 작가의 ‘천일야화’를 “작가의 삶과 생각이 잘 녹아 있는 작품이라고 느껴져서 너무 좋았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왕이 전장에 나갈 때 여자 주인공이 눈물을 흘리며 배웅하는 장면 등이 작가의 삶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 설명했다.
왕이 감옥에 갇혔을 때 여주인공인 세라자드가 기도한 ‘오늘 살 수 있는 것은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모든 사람의 바람 덕분’이라는 내용의 문장은 윤 작가가 자신의 화판에 적어 놓을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세상 천지에 문장은 넘쳐나지만 그 문장을 발견하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에서 그 사람의 수준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에게 천일야화의 미덕을 꼽으라고 하자 “너무나 많다”며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색을 유지하는 것, 뒤에 가서 깨달음을 주는 대사의 기능, 만화 곳곳에 배치된 양영순 특유의 유머 감각” 등이 쏟아져 나왔다.
윤 작가는 “기성작가임에도 요괴와 같이 네티즌의 유희를 대변하고 충족시켜서 독자층을 심도 있게 만든 ‘죄’가 있다”고 말했다. 뒤에 연재하는 작가들이 부담을 느낄 만큼 완성도가 높다는 뜻이다.
그는 윤태호 작가보다 생일도 데뷔도 2년씩 늦은 후배다. 하지만 윤 작가는 양 작가의 작품을 일부러 챙겨본다고 한다. 웹툰(인터넷 만화)을 먼저 시작해 시행착오를 미리 경험한 것도 있지만 새로운 매체에 주눅들지 않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바닷속 장면을 묘사할 때 스크롤을 내리면서 길게 이어지는 부분은 웹툰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이거든요. 시대가 지난 뒤에는 유치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적극적으로 활용을 하려고 애를 썼다는 의의가 큽니다.”
윤태호 작가는 ‘천일야화’가 웹툰 저변 확대에 미친 영향도 높게 평가했다.
그는 “온라인에서도 소모적인 콘텐츠뿐만 아니라 울림을 담을 수 있는 작품도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 전까지 웹툰에서 극화로 완성된 작품은 강도하 작가의 ‘위대한 캣츠비’ 정도였는데, 천일야화까지 성공하면서 온라인 만화에서 서사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는 설명이다.
윤 작가가 본 작가 양영순은 “스스로에게 굉장히 엄격하고 관용도 별로 없는 빡빡한 친구”다. 초기작인 ‘누들누드’ ‘아색기가’에서 보여준 성적인 유머 때문에 성인 만화가로 인식됐지만 ‘천일야화’ ‘란의 공식’으로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는 것에 대해서도 “관념을 좇는 작가기에 새로운 시도라는 생각보다는 자기 순리대로 가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윤태호 작가는 ‘멀리(전남 여수) 살아서 고마운 후배’ ‘자꾸 자극돼서 자주 보고 싶지 않은 후배’ 양영순이 품은 가능성을 무한대로 내다봤다.
“아직 양영순이 발전이라고 말할 만큼 자기의 모든 걸 다 보여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갖고 있는 그릇 자체가 커 다 풀어내지 못한 영역이 많이 있지요. 어서 빨리 다 풀어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수운기자 per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