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눈에 보이는 것만이 ‘디스플레이’는 아니다. 평판의 한계를 넘어, 디스플레이 이상의 디스플레이 세상을 구현할 새로운 테마가 펼쳐지고 있다. 마치 종잇장처럼 마음대로 구부리거나 접을 수 있는 ‘플렉시블 디스플레이’다. 머지않은 미래 우리 일상생활 곳곳에 디스플레이가 살아 숨쉬게 만들, 무궁무진한 응용 분야를 지닌 신성장동력임에 틀림없다.
우리나라가 디스플레이 강국의 위상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기술력 확보에 보다 큰 관심과 지원을 쏟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내에서도 기술 개발을 통해 수년 전부터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제품들을 선보이긴 했지만, 지금까지는 기업이나 정부 차원에서 연구개발(R&D) 투자의 우선 순위가 밀리는 것이 사실이다.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기술 개발이 아닌 탓이다. 특히 요즘처럼 전 세계 디스플레이 업체들이 치킨게임 경쟁에 돌입한 상황에서는 더욱 소외되는 분위기다.
올해부터는 전 세계 시장에서 동영상을 구현할 수 있는 능동형 플렉시블 디스플레이가 속속 등장할 전망이다. 200여개 업체가 10가지가 넘는 원천기술을 활용, 다양한 제품을 개발 중이다. 미래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원천 기술 하나 없이 양산 경쟁력으로만 승부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범국가 차원의 힘을 쏟아야 할 때다.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시장은 기회의 땅이다.
아직 세계적으로도 시장이 열리지 않았지만, 특히 ‘표준’이라 할 만한 주도 기술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 시장에서는 기존 디스플레이 기술을 대체하는 전기영동디스플레이(EPD)형 전자종이가 상용화 수준에서 가장 앞서 있다. 여기에 시장 주류인 LCD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기술이 경합을 벌이고 있다.
특히 미국·일본 등 선진국은 무엇보다 원천 소재 기술 확보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 2004년 미 국방성 주도로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연구개발(R&D)을 위해 애리조나주립대에 ‘플렉시블디스플레이센터(FDC)’를 설립했다. 첨단 정보전 상황에서 디스플레이 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해 집중 투자에 나선 것이다. 최근 내한한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인 닉 콜라너리 애리조나대 교수는 “시장이 열리지 않은 지금 기업들이 선뜻 투자에 나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며 “디스플레이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자금 지원 등 정책적인 촉매제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도 지난 2006년부터 NEC·히타치 등 총 14개 업체가 참여하는 산학연 단체인 ‘TRADIM’을 구성, 활발한 R&D를 진행 중이다. 이들은 ‘롤투롤’ 인쇄 기술을 활용, 이미 플렉시블 컬러필터와 도광판을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은 2차 사업단까지 발족해 오는 2010년까지 약 300억원을 들여 플렉시블 디스플레이를 상용화한다는 목표다.
이에 비해 아직 우리나라는 업계에서 일부 시제품을 만든 정도일 뿐, 민관 차원에서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R&D에는 소홀한 게 사실이다. LG디스플레이는 지난 2006년 14.1인치 흑백 전자종이를 개발한 뒤 지난 2007년 세계 처음 A4 용지 크기의 컬러 전자종이를 개발했다. 삼성전자도 지난 2007년 40인치 흑백 플렉시블 전자종이와 14.3인치 컬러 전자종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국내 패널 업체들의 기술 개발 사례는 속을 들여다보면 반쪽짜리 성공에 불과하다.
삼성전자·LG디스플레이 모두 미국 ‘E잉크’사로부터 원천 소재인 마이크로캡슐 방식의 표시 재료를 공급받아 제작만 했을 뿐이다. 서경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유기전자소자팀장은 “냉정하게 보면 우리가 가진 원천 기술로 생산할 수 있는 플렉시블 디스플레이는 없다”며 “소재 개발이 없는 상황에서 대기업이 내놓는 시제품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미래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시장을 겨냥해 패널과 장비·부품·소재 등 핵심 원천 기술의 동반 개발과 유기적인 협력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이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차세대 기술 확보를 위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이유기도 하다. 홍문표 고려대 교수는 “전방 산업뿐 아니라 소재·장비·부품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기술 개발 로드맵이 나와야 한다”면서 “단순히 휘어지는 제품부터 말 수 있는 제품, 궁극적으로는 자유롭게 구겼다가 펼 수 있는 제품 등을 시장 개화 시기에 맞춰 체계적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술 발전 단계에 따라 핵심 요소 기술을 선정, 집중적인 R&D에 나서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현재 LCD와 OLED 기술도 플렉시블로 진화하는 추세지만,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특유의 장점인 휴대성을 감안하면 당분간 전자종이 기술이 독자 발전해 나갈 가능성이 커 여기에 주목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전자종이는 인쇄물에 근접하는 저원가를 지향하고 고해상도와 동영상 구현이 자유로운 특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 종전 기술과는 차별화된 고기능성 재료와 그 재료에 적합한 공정과 장비 기술이 요구된다. 현재 전자종이 시장에서는 영국의 벤처 기업인 ‘플라스틱로직’과 네덜란드의 ‘폴리머비전’이 핵심 원천기술을 주도하고 있다. 영국계 대만업체인 ‘PVI’도 폴리이미드(PI) 기판을 이용한 전자종이를 독자 개발했다. 심지어 최근 경영난에 빠진 대만 최대 디스플레이업체 AUO조차도 최근 전자종이 표시 소재 관련 특허를 다수 보유한 미국 ‘시픽스이미징’의 지분 21%를 취득했다. AUO는 기록적인 손실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자종이 패널 전담 연구조직을 만드는 등 관심이 높다.
하지만 국내 업계는 전자종이 양산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곤 하나 아직 갈 길이 먼 상황이다. 해외 선진 업체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핵심 원천 기술 분야 가운데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기술부터 선점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 과정에서 산업 전반과 학계·정부가 힘을 집중하고, 미래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산업을 키워가기 위한 장기적인 전략이 마련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후방산업소재, 장비기술 취약, "상용화 발목잡아"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제품 출시를 앞둔 상황에서 소재 업체들이 연구개발(R&D)을 따라오지 못했다. 아직 시장이 안 보인다는 이유로 개발을 미뤘기 때문에 상용화 시기가 덩달아 미뤄진 적이 있다.”
국내 대기업의 한 연구원은 국내 업계의 소재와 장비 기술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점을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상용화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았다. 여타 소자 산업과 마찬가지로 핵심 후방산업인 소재·장비 기술의 취약성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품목이 전자종이의 주요 표시소재인 ‘전기영동’ 기술이다.
이는 미국의 E잉크사가 이미 선도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벌써부터 포기할 상황은 아니다. 이미 1970년대 ‘캡슐’ 방식의 기술은 일본 특허가 만료됐고, 다른 방식의 전자종이 표시소재 원천 기술을 개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표시소재 개발을 등한시하는 사이 전자종이 시장이 개화하게 되면 또다시 LCD의 액정처럼 100% 해외에만 의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
장비 개발도 서둘러야 한다.
기존 디스플레이 제조 공정이 고온·고진공에 기반을 뒀다면 플렉시블 디스플레이는 상온·상압 공정을 기반으로 생산 단가를 획기적으로 낮춰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보다 공정을 대폭 단순화할 수 있는 ‘롤투롤’ 인쇄 장비가 필요하다. 이 기술은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외에도 태양전지·전자태그(RFID) 등 차세대 소자의 대규모 양산 공정에 폭넓게 활용될 수 있기 때문에 국가 차원의 R&D가 필요한다는 지적이다. 국내 대기업들이 일부 장비 개발을 진행 중이지만, 아직은 정밀도가 크게 떨어진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또 장기적으로는 유기반도체·유기절연체·유기전극재료 기술 등을 연구, 미래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시장을 겨냥한 장기적인 투자도 준비해 나가야 한다는 목소리다. 이미 세계적인 화학업체 독일 머크가 발 빠르게 유기전자 소재 개발에 투자를 확대해 나가고 있는 것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서경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플렉시블소자팀 박사는 “생산성 향상에만 주력하는 단기적인 R&D 투자보다 차세대 원천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정부와 산학연이 장기적인 발전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동인기자 dilee@etnews.co.kr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 디스플레이 전체 시장(플렉시블 디스플레이 제외) 대비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비중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