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만화는 ‘공포의 외인구단’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양산업이던 만화 대여점을 원위치로 돌려놨을 정도였으니까요.”
스테디셀러 ‘열혈강호’의 스토리를 쓴 전극진 작가는 “당연히 누군가 ‘내 인생의 만화’로 꼽았을 것 같았는데,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해 웬 떡이냐 싶어 잽싸게 추천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 9일 서울 도곡동 한 커피숍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20여년 전 읽은 작품의 장면과 대사를 선명하게 기억해냈다.
“사실 공포의 외인구단을 꼽으면서 이현세 선생님께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 걱정도 했어요. 아직도 현역에서 왕성하게 활동을 하시는 분인데 20년도 지난 작품을 꼽으려니 그런 걱정이 앞섰습니다.”
전극진 작가가 공포의 외인구단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 만화를 즐겨 읽던 그는 여느 때처럼 들른 대여소에서 공포의 외인구단을 처음 보고 “작가가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 정도로 강렬한 느낌이었어요. 마지막에 엄지가 까치를 찾아와 한 번만 져달라고 했을 때 까치가 마동탁이 친 공을 얼굴로 맞는 장면을 보면서 특히 그랬습니다. 맹목적인 사랑과 광기가 끝나면 허무한 게 일반적인데 이 작품은 잔상이 남는 게 달랐습니다.”
그 당시 공포의 외인구단에 빠진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어린이에게 유해한 공간 정도로 취급되던 대본소에 어른들을 끌어들였고, 이후 창작된 작품 중 상당수는 까치, 엄지, 동탁의 관계를 차용했다.
“공포의 외인구단이 나오는 날이면 모든 만화가 잘나갔어요. 대본소에서 순번표를 나눠주며 대여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친구들끼리는 해피엔딩이다, 새드엔딩이다를 두고 싸우기도 했습니다.”
공포의 외인구단을 처음 본 지 8년이 지나 군에서 제대한 전 작가가 스토리 작가로 입문했을 당시 주인공 이름을 정하지 못하자 주변에서 “까치, 엄지, 동탁으로 하라”고 할 만큼 작품의 영향력은 지속됐다.
까치와 엄지의 관계, 지옥훈련 등 비현실적인 설정에도 고등학생 시절 전극진 작가는 “경도됐다”고 말했다. 그는 “조금 유치하지만 그때는 던져진 까치가 자기를 버려가면서까지 사랑을 지키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남자’라고 공감했다”고 고백했다.
충격적이고 인상적인 작품이었기에 명장면 역시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 전극진 작가. 그는 퇴물이 된 야구선수가 친구들로부터 놀림받는 아들 앞에서 퍼펙트 게임을 만드는 장면은 가슴을 울컥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공포의 외인구단은 스토리, 캐릭터, 그림 모두가 유기적인 결합을 이뤄 폭발력을 발휘한 작품입니다. 저는 예술의 영역으로 승화되는 것은 광기의 유무라고 생각하는데 작품 속의 까치에는 광기가 담겨 있잖아요.”
그는 애장판으로 나온 공포의 외인구단을 샀지만 “고등학교 시절 봤던 강렬함과 너무 좋아했던 느낌이 바래질까 두려워 1권만 읽고 더 이상 읽지 않았다”고 했다.
전극진 작가는 가끔 공식적인 석상에서 청소년기를 지배한 이현세 작가를 볼 기회가 있었지만 인사만 했을 뿐 특별히 작품 이야기나 팬이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지는 못했다고 한다.
“워낙 높은 선배라 제가 먼저 뵙자는 말은 언감생심 할 수도 없습니다. 만나주신다면 제게는 더 없는 영광이지만요.”
이수운기자 pero@etnews.co.kr
◆전극진 작가는?
국내 30·40대 남성이 20대에 한번쯤은 읽어봤을 무협만화 ‘열혈강호’의 스토리 작가다. 양재현 작가와 함께한 대표작 열혈강호는국내 단행본 만화 사상 최초로 360만부를 돌파한 기록을 갖고 있다. 책 읽기를 좋아했던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더 이상 읽을 만화책이 없을 정도로 만화책을 탐독한 재수 시절 ‘나도 한번 해볼만 하다’는 생각에 스토리 작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90년 ‘주간만화’에 ‘벼랑’의 스토리를 발표하며 데뷔했다. 최근에는 ‘열혈강호’와 함께 학원물 ‘브레이커’의 창작에 매진하고 있다.
◆공포의 외인구단은?
만화란 어린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던 1983년, 교복 입은 고등학생과 직장인까지 대본소로 끌어들인 명실상부한 당대 최고의 인기작이다. 주인공 엄지를 향한 오혜성(까치)의 맹목적이면서 순수한 사랑을 표현한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말은 최고의 유행어가 됐다. 본격적인 성인극화의 시대를 연 공포의 외인구단은 이현세 작가를 순식간에 유명인으로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1986년에는 이장호 감독이 영화로 제작해 ‘영화로 만들어진 국산 만화 1호’라는 기록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