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IT 분야 위상이 작금의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더 올라간 듯한 느낌이다. 매출 감소와 적자로 허덕이는 해외 글로벌 기업에 비해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한국 대표 기업이 반도체·디스플레이·휴대폰은 물론이고 TV·에어컨 등의 가전제품에 이르기까지 우리 전자산업이 보여준 약진은 눈부실 정도다.
휴대폰을 예로 들어 보자. 3년 전 최지성 삼성전자 정보통신부문 총괄사장이 취임하면서 던진 일성이 생각난다. 시장 점유율이 10% 안팎인 삼성전자가 40%대의 절대 강자인 노키아를 수년 내에 따라잡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보르도 TV’로 시장을 선도한 최 사장이라고 해도 허무맹랑하게 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오늘날 삼성전자의 휴대폰 시장 점유율은 20%에 다가서면서 점유율이 줄고 있는 노키아를 따라잡을 듯한 기세를 보이고 있다. 휴대폰 산업이 보여주고 있는 디지털융합은 방송·통신에서 시작해 전 산업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이 디지털 융합산업에 가장 필요한 것은 소프트웨어와 콘텐츠다. 하드웨어 기술이 고도화된 상태에서 일반 사용자가 비디오·오디오 등의 멀티미디어 응용서비스를 자유로이 누리게 하기 위해서는 콘텐츠가 다양하게 제공되고 이를 쉽게 제작·가공·배포·보관하고 지키는 등의 기술이 필요하다.
소프트웨어(SW)와 콘텐츠를 묶어 ‘소프트 IT’로 보았을 때, 아직은 소프트 IT 비중이 하드웨어(HW)에 비해 작지만 세계 시장에서는 소프트 IT 성장률이 HW의 두 배에 이르는 8%에 근접하고 있다. HW 업체인 인텔·HP·델 등이 최근 경쟁적으로 플랫폼 및 콘텐츠 시장에 진입하고 타임워너·뉴스코퍼레이션 등 기존의 미디어 업체가 콘텐츠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한국 콘텐츠시장은 지난 수년간 무려 18.6%의 성장세를 보였다. 그런데 한국 기업의 위상은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2008년 말 현재 세계 SW시장 규모는 약 1조달러에 달하는데 한국의 연간 SW 수출은 20억달러 안팎에 머물러 있고, 다른 콘텐츠 분야의 수출 액수 역시 미미한 수준이다. 콘텐츠 사업을 강화하려는 세계적인 추세와는 달리 최근 KT와 온미디어 등은 콘텐츠 관련 자회사를 매각하려는 실정이다.
정부가 디지털 뉴딜 사업을 추진하면서 소프트 IT 분야에의 투자도 본격화한다고 한다. 그간의 지속적인 투자로 SW와 콘텐츠 분야의 기초 및 중급 전문인력은 규모가 어느 정도 갖추어졌으니 이제는 산업의 큰 틀을 짜고 기업의 전략을 수립·시행하는 고급 전문 인력의 양성에 주목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기존의 고급인력 양성시스템은 굴뚝 산업을 포괄하는 범용적인 인력 훈련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소프트 IT는 전통 산업은 물론이고 HW IT와도 본질적으로 다른 속성이 있어 여기에 특화된 교육이 필요하다. 구입한 원료만큼만 제품 생산이 가능한 HW산업과 달리 소프트 IT 산업은 동일 재료(콘텐츠)에 약간의 가공을 가해 소비자에게 반복적·지속적 공급이 가능하다. 디즈니는 이 특성을 살린 원 소스 멀티 유스(OSMU) 전략으로 일류기업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융합 현상이 나타나기 전인 1997년부터 선보인 세계적인 흥행물인 해리 포터 시리즈는 2006년까지의 매출액이 동기간 한국 반도체 수출 총액보다 많은 308조원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해리포터도 나중에 가세한 할리우드 영화사의 치밀한 콘텐츠 운영 전략 없이는 여기까지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디지털 융합산업 시대에 콘텐츠의 효과적 운영은 더욱 중요해질 것인데, OSMU처럼 콘텐츠 산업의 전 과정(기획·제작·마케팅·유통·포장 및 재가공·재분배)을 잘 운영할 수 있는 인재가 산업계 전반에 걸쳐 포진하고 있어야 한다. 특수 훈련을 받은 군인이 많아도 전략·전술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전쟁에서 이기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기술로 콘텐츠를 만들어도 경영전략이 받쳐주지 않으면 세계 시장에서 생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차동완 KAIST 정보미디어 경영대학원 원장 tchadw@business.ka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