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학교에서 학생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 영어선생님은 한국에 새로 오셔서 뭘 몰라, 수업시간에 영어로 토론하고, 책도 많이 읽게 하는데. 그런다고 영어 토플점수가 더 나오는 것은 아니잖아” 한다. 들으며 쓴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왜 영어를 배우는지를 물어보면, 학생들은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공부를 한단다. 영어를 잘해 의사소통을 하고 이를 이용할 생각은 저 뒤로 밀려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목적을 잃은 숫자놀음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수능점수의 작은 차이에 의해 인생이 바뀌고, 대학교수 임용과 승진에도 논문 편수와 인용지수라는 점수로 합격을 판가름하고 있다. 이러한 정량적인 지표는 우리 사회의 빠른 변화에 걸맞은 평가제도가 만들어지기 전에 또 이를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전문가가 없던 시절에 조금이나마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고자 점수제라는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이 고착화돼 그 점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접어두고 점수에만 관심을 두어왔다.
그럼에도 지식기반사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식창출이 국가발전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될 수밖에 없는 사회가 됐다. 남의 기술을 따라가기만 하던 개발도상국까지는 이러한 점수로도 기본은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를 선도해야 하는 현재의 우리 사회는 점수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지식창출이 절실하다.
지난 10여년간 이러한 새로운 개념의 지식창출을 위해 정부는 1997년 3조원에서 2008년 11조원으로 매년 수조원의 연구비를 지원해 좋은 연구를 지원하고, 고급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과학재단과 학술진흥재단을 통합해 연구재단으로 새로이 출발, 국가 발전의 가장 기본적인 지식창출의 원동력을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 및 인력양성을 지원하는 제도도 국가 세금으로 운용되다 보니 다른 제도와 마찬가지로 규제와 감사, 평가의 객관화로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세계적인 개념의 지식생산을 위해서는 창의적 연구와 인력양성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여건과 제도를 마련해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선도적인 연구결과를 얻기 위한 △장기간 지원 △우수한 연구인력의 지속적 지원을 위한 단계적인 지원제도 △연구 성격에 따라 필요한 연구비 집행의 유연성 △정성적 평가개념 도입 등의 개선은 연구활성화를 위한 한 단계 발전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제도가 불신을 근거로 이를 제재하는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으나 이러한 제도에 변화를 줘 우리 사회 발전의 가장 앞에 서서 지식을 창출하고자 밤낮으로 열심인 과학 사회의 구성원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성공적으로 운용되기를 희망해 본다.
우리나라는 지난 60년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격동적인 변화를 겪어왔다. 일제 식민치하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일본이 노벨상을 받던 1940년대에 우리는 변변한 과학교육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60여년이 지난 지금은 반도체, 배터리, 자동차, 조선산업이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수준에 올랐고,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현재를 있게 했다. 다음 세대는 세계적인 지식창출을 바탕으로 한 사회 발전을 이끌어내야 하며, 이를 위해 연구와 고급 인력양성의 지원체계를 성공적으로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혼돈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안을 들여다보면 발전하고 있는 모든 곳에서는 해야 할 일, 이뤄야 할 일을 누군가가 꾸준히 해내는 사례를 자주 보게 된다. 신뢰를 가지고 이 구성원들을 지원함으로써 최선을 다해 우리나라가 세계를 선도하는 지식을 생산하며 발전했으면 하는 희망이다.
이공주 이화여자대학교 약학대학 교수 kjl@ewh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