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자동차 산업이 극심한 격변기를 맞고 있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 크라이슬러가 파산 보호를 신청한 가운데 생존을 위한 글로벌 자동차 업계의 합종연횡이 본격화되고 친환경 자동차로 패러다임 전환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제 자동차 업계에서 내연기관에서 전기(電氣)로 바뀌는 패러다임 변화에 신속히 적응하지 못하는 기업은 생존할 수 없다. 불과 11년 뒤인 2020년에는 새로 팔리는 자동차 5대 중 1대는 하이브리드차, 순수 전기차가 차지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석유가 아닌 전기가 주도하는 미래의 자동차 시장에서 가장 핵심부품은 배터리다. 언젠가 고갈될 석유를 대신해서 자동차가 움직이려면 가볍고 오래 가는 첨단 배터리 기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난 3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취임 후 첫 번째 가진 의회 합동연설에서 “미국 자동차 회사들이 신형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생산하지만 이들 자동차에는 한국산 배터리가 들어간다”고 지적했다. 얼핏 보면 한국을 추켜세우는 말 같지만 실제로는 몰락한 미국 자동차 산업의 회생에 배터리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지 대통령 스스로 잘 안다는 뜻이다.
요즘 한국과 미국, 일본은 친환경 자동차에 들어가는 배터리 시장을 놓고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미래 자동차 산업의 패권을 둘러싼 배터리 전쟁은 이미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LG화학은 올 초 미국 GM의 하이브리드 자동차(HEV)에 리튬이온배터리를 2015년까지 독점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그동안 HEV용 배터리 시장을 장악해온 일본기업을 제치고 한국기업이 GM 납품건을 따낸 배경은 국산 배터리의 소재특성이 더 우수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지난 98년 도요타가 HEV 프리우스를 처음 상용화한 이래 안정성이 뛰어난 ‘니켈수소(Ni-MH)’ 배터리에 집중하면서 방대한 특허권을 보유하고 있다. 이 때문에 LG화학, SK에너지 등 국내 배터리 제조사는 친환경 자동차 배터리의 주역으로 리튬이온 배터리에 초점을 맞췄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무게가 가볍고 에너지 밀도와 출력전압도 50%가량 더 높다. 이미 한국은 휴대폰 산업 덕분에 세계 리튬이온 배터리시장의 4분의 1을 장악했고 기술력도 세계 정상이다.
리튬이온계 전지의 가장 큰 문제점인 과열, 폭발의 위험성도 기술적으로 거의 해결됐다. LG화학이 GM의 엄격한 테스트과정을 뚫고 대규모 공급계약을 따냄에 따라 국산 리튬이온배터리의 기술력과 가격경쟁력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여타 국내 배터리 업체들도 리튬이온 배터리 양산시설에 막대한 투자를 하면서 세계시장을 선도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업계에서는 올해를 기점으로 자동차용 리튬이온 배터리시장이 연평균 50%씩 성장하고 시장규모도 내년 7억3000만달러에서 2015년 175억달러로 급성장할 것으로 기대한다. 전문가들은 특히 HEV보다 용량이 두 배 이상 큰 순수 전기차용 배터리의 수요는 향후 더욱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추정한다.
◇차량용 배터리 시장의 구도
한국이 주력하는 리튬이온 배터리는 니켈수소 배터리보다 성능 면에서 우수하고 현재로선 친환경 자동차 배터리 시장의 주도권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주 일본 정부는 신에너지·산업기술종합개발기구(NEDO)를 통해서 향후 10년 내 리튬이온배터리의 가격은 10분의 1로 낮춘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정부도 리튬이온 배터리의 자국 내 생산을 독려하기 위해 파격적인 자금지원에 나섰다. 미국 에너지부는 총 24억달러를 지원하는 전기·하이브리드카 배터리 개발사업에 GM과 다우케미칼, 존슨컨트롤, A123시스템 등 총 165곳이 지원했고 이르면 이달에 사업 시행자를 최종 선정할 예정이다. 미시간주를 비롯한 주정부마다 배터리공장의 유치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그러나 한국 배터리기업의 기대와 달리 전문가들은 미래 차량용 배터리 시장의 판도가 현재의 기술적 우위를 지닌 리튬이온 배터리의 일방적 우위로 끝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배터리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면서 훨씬 저렴하고 오래가는 신형 배터리가 갑자기 등장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 일본이 주도하는 니켈수소 배터리는 충분히 검증된 안전성과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2010년대 후반까지 HEV시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도요타는 앞으로도 가격과 안전성을 고려해서 HEV에 니켈수소 배터리를 꾸준히 장착할 계획이다. 리튬이온 배터리 핵심소재인 리튬의 빠듯한 수급문제도 국내 배터리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 지금도 고급형 전기차 원가의 절반은 리튬이온 배터리가 차지한다. 이미 리튬이온 배터리를 탑재한 애플리케이션 종류가 휴대폰 등 휴대형 정보기기 외에 친환경 자동차로 늘어나면 국제 리튬 가격이 점점 높아질 것이다.
따라서 자동차 업계가 리스크가 높은 특정 배터리 기술에 올인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대안적 배터리 기술로 주목받는 분야는 금속공기전지다. 지구상에서 가장 흔한 금속인 ‘아연’을 산화시켜 전류를 만드는 금속공기전지가 국내 벤처기업에서 개발되고 있다. 중국기업에서 주로 제조하는 리튬인산철 배터리(LiFePO4)도 뛰어난 가격대비성능을 갖고 잇다.
조원일 KIST 박사는 “현재 자동차도 LPG, 가솔린, 디젤 등으로 연료가 용도에 따라 구분됐다”면서 “향후 친환경 자동차 배터리도 가격대, 성능에 따라서 납축전지에서 리튬이온까지 다양한 종류가 공존할 것이기에 다양한 배터리 원천기술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친환경 배터리업체들의 최대 아킬레스건은 바로 휴대폰용 리튬이온 배터리에 편중된 산업구조다. 리튬이온계 배터리의 성능을 능가하는 배터리 기술이 상용화되면 금방 코너에 몰릴 위험이 크다. 국내 2차 배터리업체도 이 같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포트폴리오의 다양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차량용 배터리 관련 R&D지원은 대기업이 장악한 리튬이온분야에 편중되는 것이 현실이다.
◇국내 차량용 배터리 산업의 딜레마. 완성차 계열만 살아남는다.
한국은 자동차와 전기, 가전산업이 고루 발달해 친환경 자동차와 관련한 핵심부품기술을 대부분 갖고 있다. 친환경 자동차 시장이 본격화되면 한국에서 세계적 자동차 모듈업체들이 등장할 유리한 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러나 우수한 기술력을 지닌 전기차 부품업체들은 절망감을 호소하고 있다. 세계 정상의 기술력으로 친환경 자동차 부품을 개발해도 이른바 그동안 완성차에 부품을 납품해온 끈이 없으면 친환경 자동차시장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는 배타적 산업구조 때문이다.
정부에서 진행하는 친환경 자동차 R&D프로젝트도 중소기업의 기술력이나 부품수준을 평가하기 보다 현대, 기아, GM대우 등 완성차 계열이냐에 영향을 받는 실정이다. 결국 친환경 자동차 부품을 개발한 중소기업들은 내수시장을 포기하고 큰 돈을 제시하는 외국업체들에 속속 넘어가고 있다. 지난해 미국 최대의 전기차 배터리 회사는 국내 중견 리튬이온전지 회사 에너테크인터내셔날(옛 새한에너테크)을 전격 인수했다. 급성장하는 전기차 배터리 수요를 감당할 아시아 생산기지를 확보하려는 포석이다.
지난 연말 미국 다우케미칼은 리튬이온 배터리팩에서 세계정상으로 평가받는 국내업체 코캄의 지분을 대거 인수했다. 미국기업들은 한국에서 사들인 첨단 배터리기술로 자국의 친환경 자동차에 들어갈 배터리 생산을 준비하고 있다. 알토란 같은 친환경 자동차 부품기술을 뻔히 눈뜨고 외국인들이 다 사가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시장논리에 따라서 국내 배터리 기술이 외국인에 살 수도 있지만 국내 완성차업계의 폐쇄적 부품소싱정책 때문에 제 값을 못받고 넘기는 것이 가장 문제라고 지적한다. 최상열 최상열 넥스텔리전스 연구소장은 “친환경 배터리는 한국 자동차 산업의 미래를 좌우할 핵심산업이다. 우리가 배터리 기술을 소홀히 여기면 지금 쌍용차가 겪는 비극이 4∼5년 뒤에 한국 자동차 산업 전반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 배터리업체들의 도전.
중국의 자동차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친환경 배터리 분야도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서 생산되는 리튬인산철 배터리는 친환경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새로운 다크호스로 주목을 끌고 있다.
리튬인산철 배터리는 과열, 과충전 상황에도 폭발할 우려가 없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화학적으로 극히 안정되고 값싼 인산철이 주재료기 때문에 동급의 리튬이온 배터리보다 약 30% 저렴해 가격경쟁력이 뛰어나다. 한국과 일본기업이 선점한 차량용 리튬이온 배터리에 비하면 무겁고 성능은 다소 떨어진다. 중국기업들은 고효율 니켈수소, 리튬이온 배터리 기술도 선진 수준에 도달했고 에너지 제어 시스템 기술도 상당한 수준으로 평가된다.
전기자동차 상용화의 선두주자인 중국 비야디는 지난 연말에 자동차용 리튬인산철 배터리(LiFePO4)의 대량 생산 기술을 확보하고 자체 전기차 ‘F3DM’에 탑재하기도 했다. 현재 리튬인산철 배터리는 거의 전량 중국 대륙에서 수작업 라인에서 생산된다. 리튬인산철 배터리는 리튬이온 배터리에 비해서 리튬함량이 작고 원자재 공급이 안정적이어서 보급형 납축 배터리의 대체 상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 배터리 업체들도 중국에서 생산하는 리튬인산철 배터리를 포함해서 친환경 자동차 배터리 제품군을 다원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업체들의 친환경 자동차로 급선회하는 중국 자동차 산업의 도전에 제대로 대응하려면 폐쇄적 부품소싱에서 벗어나 배터리 분야의 다양한 중소기업과 제휴해 경쟁력을 업드레이드해야 한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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