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기억 중에 가장 생생한 건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다. 아빠는 사우디아라비아에 현장 근무 가시고, 엄마는 요구르트 배달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났다. 맏딸인 내가 병상에 누워 있는 엄마의 환자복을 만지면서 느꼈던 그 껄끄러움과 막막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엄마와 나누어 먹었던 병원밥은 참 맛있었고, 그때 타국에서 전화한 아빠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멋있었다.
옛 기억은 좋은 것만 밀려오지 않는다. 좋을 때 행복했던 순간만큼이나 어려울 때 잘 견뎌냈던 것들이 소상히 기억난다. 모든 아기들이 태어날 때부터 예쁜 것은 아니듯이 우리의 추억에도 얼룩이 많다. 좋은 때는 남과 있고 나쁠 때는 가족과 함께한다. 어려운 때를 잘 버텨주고 힘듦을 함께하는 것이 가족이다. 그 역경들을 억척스럽게 치러내는 과정이 가족의 생명력이기도 하다.
화창한 봄날처럼 살도록 해주겠다는 장밋빛 약속도 좋지만 혹독한 겨울에도 함께 버텨 주겠다는 꿋꿋한 다짐도 필요하다. 인생에는 장미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숲을 거닐어도 땔감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같이 살면서도 가족의 아픔을 모르는 때가 있다. 제 옷에 쓸려 물집이 잡히듯 늘 곁에 있는 가족 때문에 제일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싸움, 가출, 병, 빚, 사고, 죽음 등 함께 살다보면 가족이 완전히 파괴될 것만 같은 순간들이 기습적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깨지지 않고 남아 있고 , 서로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 가족이다. 고난은 회복해야 추억이 된다. 이겨내지 못한 고통은 치명적인 실패지만 극복한 아픔은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가족은 그렇게 쉽사리 놓을 수도 쉽사리 떨칠 수도 없는 사이다. 그리고 이 역경이 우리 가족에게 어떤 추억을 만들지 공손하게 받아들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