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지하철을 타려고 개찰구에 들어가려는 순간 누군가 ‘저기요∼’ 하고 부른다. 50대로 보이는 중년 아저씨 한 분이 좀 도와달라며 돈을 내미는데 알고 보니 지난 5월 설치한 카드형 1회용 승차권 판매기 사용법을 몰라 헤매다 나를 찾은 것이다. 이용 방법과 도착역에서 카드 보증금을 꼭 찾아야 한다는 얘기를 알려드리니 고맙다며 “자꾸 새로운 기기들이 나오니 익히는 것만 해도 힘겹다”고 하소연한다. 지금은 그런 일이 없지만 1980년대 초반 현금입출금기(ATM)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은행에 가면 기기 사용법을 알려달라거나 돈을 대신 찾아달라고 부탁을 하는 어른이 꼭 몇 분씩 있었다.
기술 발달과 시장 원리는 늘 새로운 상품, 기기, 서비스, 미디어를 만들어내지만 이것은 열광과 동시에 불안감을 주기도 한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편함이다. 새로운 것이 나오면 익혀야 하고, 시간을 투입해야 하고, 일상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별히 호기심이 강하지 않은 이상 보통의 사람은 늘 가는 길과 늘 먹는 음식, 늘 만나는 사람 사이에서 맴맴 돌게 된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주인공 멜빈 유달(잭 니컬슨)은 생소한 것의 불안감이 강박증으로 나타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런 경향은 특히 어른 혹은 기성세대에게서 더 크게 나타난다. 이미 많은 세월을 살아 ‘인생은, 세상은 이런 것’이라고 굳은 생각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클레이서키 뉴욕대 교수는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는 저서에서 “일반적으로는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들이 잦은 실수를 하게 마련이지만 새로운 변화의 시대에는 경험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실수한다”고 말했다.
전자신문이 얼마 전부터 포스트게임이라는 게임 연구기획을 시작했다. 짐작은 했지만 막상 많은 사람을 만나 보니 게임을 보는 인식은 너무 차갑다. 아이는 게임을 하고 싶어 난리고 어른들은 이를 못 막아서 난리다. 공부할 시간도 모자란 판에 게임할 시간이 어딨냐고 목청을 높이는 엄마들도 많다. 국민의 70%가 게임을 하고 앞으로 금융, 교육 등 각 분야에 안 쓰일 곳이 없는 것이 게임이다. 차가운 인식으로 인해 게임의 가치와 잠재성까지 묻혀서야 되겠는가.
역사적으로 보면 새 미디어는 늘 공격을 받았다. TV가 처음 나왔을 때 기성세대와 언론은 폭력을 조장하는 도구라고 공격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비난의 대상이 영화와 만화로 바뀌었다. 교양 덩어리 책이라고 다르지 않다. 1764년 출간된 호러스 월폴의 ‘오트란토 성’은 왕과 그의 죽은 아들의 약혼녀의 섹스를 다뤘다는 이유로 공격의 표적이 됐다. 19세기 들어 인쇄기 성능이 좋아지고 글자를 읽는 사람들이 늘면서 영국과 미국에선 대중잡지와 소설들이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정작 정치인과 기성세대들은 이를 비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우리나라 역시 18세기 상업적 목적으로 출간된 ‘방각본’ 소설들이 문제가 됐었다. 당시 전쟁이나 애정을 주로 다뤄 ‘읽으면 패가망신’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오늘날에는 ‘한글의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찬사를 받는다.
무엇이든 익숙해지고 나면 그 이전에 어땠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 법이다. 역사적인 경험이 불필요한 게 아니라면 게임에 조금 더 열린 시각과 따뜻한 시선을 가져보면 어떨까.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이 너무 좋아 죽고 못 사는 게임 아닌가!
조인혜 미래기술연구센터 팀장 ih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