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 `e사이언스`로 신약 개발의 꿈 이룬다](https://img.etnews.com/photonews/0909/090915060150_45508682_b.jpg)
가끔 ‘지구촌’이라는 말이 두렵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지구 반대편, 비행기를 타도 20시간 가까이 걸리는 먼 나라 멕시코, 그 중에서도 라글로리아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시작된 신종플루가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요즘 같은 상황이 바로 그런 때다.
지구가 장벽 없이 하나의 촌(村)을 이루면서 신종플루 외에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조류인플루엔자(AI) 등의 전염병이 수시로 국경을 넘나든다. 그럴 때마다 타미플루 같은 독감치료제를 생산할 수 없을 뿐더러 충분히 수입해서 비축해놓을 여건조차 되지 않는 우리는 그저 손만 열심히 닦고 있어야 하는 실정이다.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타미플루를 암거래하는 사람까지 있다고 하니, 독감 치료용 신약이 없는 현실이 더욱 답답하다.
그러나 ‘왜 우리에게 독감 신약이 없는가’라는 말은 함부로 꺼낼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신약이 탄생하는 과정이 그만큼 길고 어렵기 때문이다. 신약을 개발하려면 질병의 원인이 되는 목표단백질을 찾고, 그 단백질이 활동하지 못하게 막는 신약후보물질을 골라낸 다음, 실험을 통해 일일이 약효를 확인하고, 생체실험과 임상실험을 거쳐 시판에 이르기까지 평균 14년이라는 시간과 8000억원이 넘는 엄청난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어려운 것은 약효가 있는 물질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수백만개의 신약후보물질을 목표단백질과 도킹(docking)시켜 상호반응을 확인해 봐야 하는데, 그러려면 수백억원의 비용과 100년 이상의 엄청난 시간이 소요된다.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당연히 도킹할 수 있는 물질은 수천개로 제한되고 신약개발 가능성도 희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이러한 문제를 손쉽게 해결하는 방법이 제시돼 신약개발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목표단백질과 후보물질이 도킹됐을 때의 반응을 실험실에서 확인하는 대신, 고성능 컴퓨팅 자원으로 계산해서 예측해내자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은 세계 최대 그리드 인프라인 유럽 EGEE(Enabling Grids for E-sciencE)가 무상으로 제공하는 7000여개의 컴퓨터 CPU를 이용해 당뇨병 목표단백질과 31만개의 신약후보물질 사이의 반응을 단 ‘이틀’만에 시뮬레이션하는 데 성공했다. 일반 PC 1대를 사용하면 40년이나 걸릴 계산이었고 직접 실험할 때엔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도킹이었다.
내가 만난 한 생명과학과 교수는 이러한 결과가 ‘심봉사가 번쩍 눈을 뜬 것’처럼 놀랍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처럼 놀라운 작업을 컴퓨터를 잘 모르는 신약개발자들도 자신의 연구실에서 간단한 조작만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시스템화한다면 어떻게 될까.
‘e사이언스’에 신약개발과 관련한 그 답이 있다. ‘e사이언스’란 사이버상에서 연구장비와 대용량 데이터들을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첨단 연구환경을 말한다. 이 환경을 신약개발에 접목 즉 ‘융합’시키면 신약개발자 누구나 ‘전 세계에 산재해 있는 슈퍼컴퓨팅 자원을 맘껏 활용해 신약후보물질을 추려내고, 유기화합물이나 단백질에 관련된 대용량 자료들을 실시간으로 주고받으며,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연구자들과 마치 한 공간에 있는 것처럼 편리하게 가상회의를 하면서 협업’하는 꿈같은 신약개발 환경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이러한 환경이 구축되면 신약개발 기간은 절반 이상, 비용은 100분의 1까지 줄일 수 있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신약은 개발이 힘든 대신, 한 번 성공하면 끊임없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신약 R&D와 e사이언스의 성공적인 융합으로 우리가 바로 그 거위의 주인이 되는 날을 기대한다. 더불어 신종플루 같은 전 지구적 질병 앞에서도 훨씬 안전하게 국민을 보호할 수 있게 될 그 날을 말이다.
박영서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장 yspark@kist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