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때였을까. 담근 포도주를 드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잔을 건네며 “너도 한번 먹어볼래?” 하신 것이 나의 첫 술이 됐다. 이후 30년 가까이 술과 벗(?)으로 지내지만 술을 처음 접한 그날 불었던 따스한 바람, 아버지의 환한 웃음, 입안에 머금었던 달콤한 포도주 향기는 지금도 기억에 선연하다. 요즘도 고향집에 내려가면 아버지는 중년이 된 딸과 술상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얘기하는 걸 그렇게도 좋아하신다. 첫 술을 아버지에게 배운 나는 술에 대한 좋은 기억, 좋은 느낌을 갖고 있다. 만약 처음 접한 술이 입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학교 친구들과 몰래 숨어서 마시는 것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술은 오히려 일찍, 그것도 부모님에게 배워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나 보다. 무엇이든 마찬가지지만 과하면 통제력을 상실해 실수를 하거나 몸을 망가뜨리거나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위험한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술 얘기를 꺼낸 것은 게임도 비슷하다는 생각에서다. 우리 아이들의 게임에 대한 첫 기억은 어떨까. 아마 모르긴 해도 ‘이런 재미있는 세상이 있다니’ 하는 열광과 함께 근심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부모님의 모습이 오버랩돼 있을 것이다. 지난 4일부터 6일까지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PAX 게임쇼에서 만난 가렛 알렌군(18)은 게임에 대한 첫 기억이 좀 달랐다. 열 살부터 게임을 했는데 계기는 부모님이었다. 어느 겨울날 부모님이 나가자고 하더니 데려간 곳이 게임기 매장이었다고. 게임기와 타이틀을 고를 때와 포장을 뜯고 게임을 시작할 때의 그 설렘과 흥분된 느낌이 생생하다며 눈을 반짝인다. 최근 NPD그룹의 조사에서 미국 부모의 90% 이상이 자녀와 게임을 같이한다. 대부분의 부모가 게임 이용 매뉴얼과 가이드라인을 숙지해 아이들을 지도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부러운 대목이다.
지난 8월부터 ‘미래를 여는 즐거운 창-포스트게임’ 기획시리즈를 진행하면서 우리나라도 이 같은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는 의견을 많이 접했다. 많은 국내외 전문가는 더 이상 게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오히려 게임을 적극 이해하고 수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법과 제도로 대표되는 무거운 규제가 아닌 기업과 이용자가 필요에 의해 스스로 제어하고 관리하는 자율규제가 정착돼야 한다는 시각도 제시했다. “자율규제요? 말은 좋죠. 근데 우리나라 안 돼요. 그냥 놔두면 책임이고 뭐고 없어요. 무조건 법이나 규제로 강하게 해야 돼요”라고 받아치는 사회지도층 인사도 물론 있다. 우리나라가 달리 자율규제 기반이 취약한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최근 게임산업진흥법 개정안에 자율규제의 근거조항을 포함하는 등 변화는 시작됐다.
더불어 어린 아이를 둔 부모라면 꼭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 게임을 직접 해보고 아이들과 함께 즐기는 놀이문화를 가정 내에서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게임 연령대가 세 살까지 낮아지고 게임이 사회화의 창이 됐는데 무엇으로 아이와 대화하겠는가. 게임의 G자로 모르는 어떤 분이 최근 게임업계로 이직을 하면서 게임을 하기 시작했는데 아들이 더 신났다고 한다. 게임을 말리기만 하던 아빠가 갑자기 게임을 하니 얼마나 신기했겠는가.
이번 주말에 아이에게 “게임 한판 어때?” 하고 말을 건네보면 어떨까. 아이 얼굴에 환하게 피어나는 미소를 볼 수 있을 터다. ‘울 아빠·엄마 멋지다’는 칭송까지 덤으로….
조인혜 미래기술연구센터(ETRC) 팀장 ihch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