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품소재 세계 일류화를 위해] (4부)에필로그 (1)일본 부품 소재 기업

도요타 히가시치타 공장에서 직원들이 적시생산시스템에 따라 부품 공정을 진행하고 있다.
도요타 히가시치타 공장에서 직원들이 적시생산시스템에 따라 부품 공정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의 주요 부품소재 업체들이 밀집한 나고야와 도쿄 인근. 공장 라인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트럭들은 부산하게 공장을 드나들고 있다. 일본 정부가 공식 디플레이션을 선언할 정도로 어두운 경제 상황이지만 부품소재 기업들만은 다른 분위기다. 얼마 전까지 극심한 불황에 엔화강세까지 겹쳐 수난을 겪었던 표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비록 자국 내 세트 기업들은 여전히 어렵지만 한국·대만 기업들의 주문이 쇄도하면서 일본 부품소재 업체들의 회복세도 빠르다. 현지에서 만난 일본 부품소재 기업들은 한국 기업들이 금융 위기 이전의 85% 수준까지 발주물량을 늘렸다고 전했다. 제조업의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소재 시장을 ‘그들만의 리그’로 만들고, 모방할 수 없는 초정밀 부품으로 세계 시장을 주무르고 있는 일본. 그들이 지닌 경쟁력의 원천은 과연 무엇일까.

 ◇일본 경제의 희망으로=최근 일본 내에서는 세트 산업과 부품소재 산업 간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분위기다. 소니·파나소닉 등은 한국 기업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반면에 핵심 부품소재 기업들은 되레 한국에서 물량이 쏟아지고 있다. 유수의 일본 소재 기업인 도레이는 최근 삼성전자가 파나소닉에 이어 두 번째 고객사로 부상했다. 중국 시장 수요 덕분에 대만 기업들과의 거래량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도쿄 본사에서 만난 후지카와 주니치 도레이 부사장은 “그동안 주로 국내 세트 업체들 위주로 거래했지만, 최근 들어 한국·대만 등 신규 고객사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면서 “타국의 소재 업체들과는 아직 기술 격차가 있기 때문에 일본 기업들끼리 경쟁을 벌이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전 세계 IT 제품에 들어가는 핵심 소재의 70%는 일본 업체들이 생산하고 있다. 고부가가치 핵심 전자부품들도 상당 부분 일본 기업이 주도하고 있다. 일본 소재 기업들이 불황과 엔화강세의 이중고를 빨리 탈출할 수 있었던 비결은 경쟁자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지닌 덕분이다.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경기 침체기를 견디며 제조업 경쟁력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던 소재 산업은 이제 일본 경제의 ‘희망’으로 지위가 격상됐다.

 마쓰우리 도오모 주켄 회장은 “일본 기업들이 지닌 조직문화와 기술을 향한 욕심은 외부 환경 변화에도 영향을 덜 받는 내적 요인이자 경쟁력의 원천”이라며 “근래에는 정부가 ‘모노주쿠리(혼신의 힘을 쏟아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 것)’ 법안을 제정하는 등 정책 지원에도 적극 나서면서 부품소재 산업이 더욱 탄력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기술을 향한 끝없는 욕심=일본 기업들의 기술을 향한 욕심은 유별나다. 중요한 의사 결정도 기술이 항상 우선이다. 원가 절감을 위해 타국 제조 업체들이 중국·동남아 등지로 떠날 때도, 상당수 일본 부품소재 기업들은 그대로 남았다. 오직 기술력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나고야에서 차로 2시간을 달려 도착한 한다시 현지의 도요타 부품소재 공장. 단 한 번도 언론에 공개한 적이 없는 공장이지만, 한국에서 온 취재진에게 제한된 구역이나마 견학을 허락했다. 부품 제조 공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량까지 자동으로 측정될 정도로 자동화 시스템이 잘 구축돼 있다.

 최고의 생산 경쟁력을 보유한 도요타지만, 이곳 직원들은 여전히 배우고 개선해야 할 것이 많다며 긴장의 끈을 바짝 조인다. 일본인 특유의 겸손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다. 나카사코 마사미 도요타 히가시치타 공장장은 “과거에는 효율화·자동화에 만족했지만 앞으로는 ‘그린’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덧칠해야 한다”면서 “사무실에서 공장에 이르기까지 환경 개선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이런 이유”라고 말했다. 실제로 친환경 녹색 성장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부각되면서, 도요타의 공장들은 마른 수건 짜기에 다시 돌입했다. 공장 자동화 기술에 녹색 공정을 가미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모래를 많이 사용하는 주물 공정은 인체에 해로운 규산이 발생하기 때문에 대표적인 3D 공정으로 불린다. 현재 작업자들은 대부분 마스크를 쓰고 일하지만, 오는 2011년까지는 마스크 없이 작업할 수 있는 친환경 공장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것이 도요타의 목표다.

 ◇상업화에 독보적인 강점=지난 1950∼1960년대만 해도 부품소재 산업의 중심은 미국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미국·유럽 기업들이 기술 개발을 게을리하는 사이 일본 기업들의 약진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미국·유럽 기업들은 기술을 이전받아 온 일본 기업들을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전받은 기술을 발 빠르게 상용화하는 동시에 고유 기술까지 함께 만들어냈다. 얼마 되지 않아 일본 기업들은 당해낼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최근 들어 다우케미컬·듀폰 등 미국 기업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핵심 소재 개발에 다시 나섰지만 고배만 마시기 일쑤였다. 값비싼 수업료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뼈아픈 실책이다.

 일본은 남의 것이라도 우수한 기술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문화가 잘 형성돼 있다. 한국과 달리 해외에 막대한 로열티를 지급하고 기술을 사와도 고까운 시선을 받는 사례가 거의 없다. 원천 기술을 사온 뒤 더 높은 수준의 기술을 만들어내도 계속 로열티를 지급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관행이다. 비록 물질을 부가가치 있는 재료화하는 데는 일본이 독보적이지만, 기초 물질에 관한 한 미국·유럽 기업들의 기술력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들과 30여년간 거래해왔다는 손명진 대성테크 대표(한국 열처리학회 부회장)는 “한국 기업은 로열티를 주고 기술 이전을 받은 후 계약을 연장하는 사례가 거의 없지만 일본 기업은 꾸준하게 관계를 이어간다. 한국 기업이 양산 및 수율화 안정을 통한 물량 확대에만 관심이 있다면, 일본 기업은 원천 기술 확보에 더 큰 비중을 둔다. 도저히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고 혀를 내둘렀다.

<도쿄, 나고야(일본)=이형수기자> goldlion2@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