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시골길을 몇 시간 달리면, 큰 공장들이 들어서 있는 공단에 진입한다. 입구부터 몇 단계의 보안 검색을 거친 후 생산라인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연구실에 도착할 수 있다. 하얀색 방들이 무미 건조하게 늘어서 있는 일본 기업의 전형적인 연구실이다.
인근을 지나다 보면 협력업체에서 파견된 연구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다만 하얀 가운을 입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연구원들의 일면을 깊게 살펴봐도 직접 물어보지 않고는 누가 본사 직원이고, 누가 협력사에서 파견된 직원인지 알 수 없다. 함께 실험하고, 토론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같은 회사 직원으로 착각할 수밖에 없다.
◇R&BD를 위한 협력 시스템=일본은 제품 설계 단계부터 협력사들을 적극 참여시키는 ‘R&BD’ 시스템이 오래전 구축됐다. 신뢰를 기반으로 한 대·중소기업 간 협력, 이것은 일본 부품소재 산업 경쟁력의 또 다른 원천이다. 새로운 화합물질을 합성, 개발하는 데 수십년이 걸림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이 투자를 철회하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을 믿고 지원하는 대기업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대·중소기업은 함께 성장해왔다. 소니·파나소닉 등 일본 세트 업체는 협력업체에 엄격한 품질 수준의 제품을 요구했고, 부품소재 업체들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기술 발전을 거듭했다. 십여년 전에는 몇몇 대기업의 경쟁이 과열돼 협력 업체를 지나치게 통제하는 부작용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 대기업 계열을 제외하고는 제품만 좋으면 어디든지 납품할 수 있는 경쟁 환경이 구축됐다.
최근에는 자원 고갈, 지구 온난화 문제가 현안이 되면서 기술 융합을 통한 그린 생산 시스템을 위한 협력들이 진행되고 있다. 또 일본 부품소재 산업의 경쟁력 제고를 위한 민간 차원에서의 협력들도 잇따라 시도되고 있다.
마쓰우라 모토 주켄 회장은 “일본에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따로 떼서 착수하는 비즈니스는 거의 없다”면서 “서로 존중하면서 신뢰를 기반으로 개발 초기부터 협력 단계가 착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고 말했다.
◇자발적인 대·중소기업 협력 사례 ‘도레이 클러스터’=부슬비가 내리는 스산한 날씨에 교토에서 차로 네댓 시간을 달려갔다. 동해에 인접한 세개 현. 도야마, 이시카와, 후쿠이에 도착했다. 세계적으로 눈이 많이 내리기로 유명한 혼슈의 서쪽 호쿠리쿠 지방. 한적한 시골 마을로 보이는 이곳은 사실 전통적으로 ‘일본 실크의 메카’로 불려왔다.
최근 이곳에서는 민간 차원에서 새로운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세계적인 소재기업인 도레이가 지역 협력업체들과 2004년 자발적인 민간 클러스터를 조성했다. 도레이는 1926년 세계 최초로 설립된 소재기업으로, 3000여명의 연구인력과 9개의 연구소를 보유한 기술 기반 업체다.
특이한 점은 지역 소재 산업의 육성을 위해 정부기관이 아닌 민간기업 도레이가 주도적으로 나섰다는 점이다. 도레이의 리더십 아래 지역 중소업체들의 경쟁력 제고, 첨단 소재 개발을 지원하는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기업 간 기술, 정보를 공유하고 현지 우수 대학 및 연구기관과 제휴해 산학협동 시스템을 구축했다. 9개의 연구회가 조직돼 지역 기업들의 연구개발 능력을 높이고 있으며, 지자체 및 지역 은행과도 연계가 강화되고 있다. 계열, 업태를 초월한 현지 기업들의 결집을 기반으로 대학·인재·자금을 융합시킨 지식산업 클러스터로 자리 잡았다. 처음에는 68개의 업체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100개사가 넘는다.
사무카와 마사히코 도레이 홍보 매니저는 “중국의 저가공세, 엔화강세 등으로 인해 지역 중소업체들이 도산하는 등 일본 중소기업들의 위기감이 높아졌다”면서 “지역 기업의 오랜 경험에 도레이의 경영 능력, 기술력이 더해지면서 세계에 유례가 없는 첨단 재료 일관 제휴체제가 구축됐다고 자체 평가한다”고 설명했다.
◇특화된 소재 개발로 경쟁 회피하는 ‘마이웨이’ 전략 구축=대기업의 협력업체에 대한 수직계열화는 일본 기업들의 고질적 문제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재벌기업인 미쓰비시·미쓰이는 수직계열화가 심해 서로의 협력업체에서 부품소재를 교차구매하는 사례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0년 전부터 이런 경향은 급속도로 수그러들었다. 부품소재 업계에 지각 변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일본 석유화학 기업들이 경쟁력 강화를 위해 대규모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연대하기 시작했다. 원료의 확보, 조달 단계부터 효율성을 검토했다. 시장 확대와 원료 수급의 다양화를 위해 아시아·중동 등으로 진출하는 업체도 많아졌다. 설비와 인력의 합리화를 통해 일본 부품소재 업체들은 가격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일본 부품소재 업체들은 과열 경쟁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이 잘할 수 있는 소재에 집중하는 ‘마이웨이 전략’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아사히 가세이는 ‘성장 액션 2010’을 통해 LSI·홀 소자·버퍼 코트 수지와 정보 전자 및 리튬이온 전지용 세퍼레이터 등에 집중하는 장기 전략을 발표했다. 쇼와 덴코는 ‘프로젝트 패션’을 통해 초고휘도 LED, 연료 전지용 카본 수지 세퍼레이터 사업 진출 의지를 밝혔다. 미쓰비시화학은 ‘혁신 단계2’를 설정하고 광미디어, 표시재료, 리튬이온 전지용 전해액, 부극재 및 신약 개발 비중을 높이기 시작했다. 스미토모 화학은 정보, 전자, 의약, 농화학, 생명과학 분야의 성장 전략을 수립하고, 액정용 편광필름·액정용 고순도 약품·포토레지스트 사업에 과감한 투자를 감행했다.
김현준 한국기술정보서비스 대표는 “1990년대 중반부터 일본 기업들은 자신들의 강점을 정확히 파악해 초기 제품 설계 단계부터 협력업체들을 개발에 참여시키는 전략을 추구했다”면서 “일본 부품소재 산업이 회춘하는 동시에 경쟁력을 한층 더 강화하는 시기였다”고 말했다.
도쿄(일본)=이형수기자 goldlion2@etnews.co.kr
■인터뷰-후지카와 주니치 도레이 부사장
고층 건물이 촘촘히 들어선 도쿄 중심가 틈 사이에서 옅은 은색 유리로 휘감긴 도레이 본사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흔한 간판 하나 걸려 있지 않은 그곳에서 우리 취재단은 몇 차례의 보안 검문을 거친 후 접견실에서 후지카와 주니치 도레이 부사장을 만날 수 있었다. 보안상의 이유로 사진 촬영은 일절 금했다.
일본 부품소재 산업의 경쟁력에 대해 질문하려는 찰나에 되레 그는 한국 IT산업 동향을 물었다. 잠시나마 그에게 오히려 인터뷰당하는 당황스러운 상황이 연출됐다.
일류 소재 기업인 도레이의 부사장답지 않게 인터뷰가 시작되자마자 그는 한국, 대만 기업들의 약진을 걱정했다.
“세계 부품소재 시장은 계속 커지고 좋은 흐름을 보일 것입니다. 다만 지금까지는 일본 기업끼리 경쟁을 했지만 앞으로는 한국·대만 기업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죠. 특히 한국은 삼성·LG라는 굉장한 세트 기업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곧 무서운 상대로 부상할 것입니다. 아니 이미 그런 상황이 벌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최근 부품소재 분야 육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한국 정부와 기업들에 경계심을 나타냈다. 삼성은 제일모직, LG는 LG화학을 통해 소재 분야에서 무섭게 도레이를 추격하고 있다는 것.
“미국·유럽 기업들이 기술 혁신을 게을리하는 사이 일본 기업들이 부품소재 분야에서 앞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는다면 한국·대만이 얼마든지 앞지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오른 환율도 고민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엔달러 환율이 88엔 정도인데, 100엔 수준에서 안정되지 않는다면 부품소재 기업들도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엔화강세 현상이 지속된다면 비용절감을 위해 일본 내 생산을 줄이고 한국·중국 등 해외공장에서 생산량을 늘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술·품질 수준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또 일본산 소재 가격 비중이 높아지면 한국·대만 세트업체들이 직접 소재를 개발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비서의 재촉도 뿌리치고, 다음 일정도 미룬 채 그는 일본 기업들의 기술 개발 전략론을 강조했다.
“일본업체들은 첨단 소재 개발을 통해 고부가가치 품목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격 경쟁을 펼친다면 일본 기업에 승산은 없죠. 가격이 좀 비싸도 고객사의 수율 및 생산성을 높여주는 제품을 개발해야 합니다. 삼성전자도 우리에게 값싼 소재가 아니라 효율적인 제품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합니다.”
■일본업체의 고민거리
일본 세트업체의 부진은 부품소재 기업들에도 고민거리다.
소니·파나소닉 등 일본 업체의 물량 감소분을 삼성·LG 등 한국 기업과 대만 기업들이 상쇄하면서 매출 타격은 피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IT의 전방 산업인 세트 부문이 무너지면 일본 경제 생태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결국 부품소재 업체들도 타격을 받게 된다. 이런 위기감이 일본 부품소재 전문가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
기술 경쟁력을 확보한 기업들은 괜찮지만, 한계기업들은 당장 타격을 받고 있다. 세트기업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중국·베트남 등지로 생산라인을 옮기면서, 일본 내에서 조달하는 부품소재의 물량이 줄어들고 있다. 대신 한국·중국 등 현지 기업에 공급받는 물량은 늘고 있다. 엔화강세 현상이 지속되면서 해외 생산량을 늘려 잡는 기업들은 더욱 많아지고 있다.
나카사코 마사미 도요타 히가시치타 공장장은 “일본 중소기업들은 세트업체와 함께 성장해왔는데 국내 생산 규모가 줄면서 타격을 받고 있다”면서 “전국적으로 1년에 1만4000여개의 공장이 일본에서 문을 닫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기술과 품질력 수준도 조금씩 훼손되고 있다. 최근 세트업체를 따라서 중국·베트남으로 공장을 이전하는 일본 부품소재 업체들이 생기고 있다.
현지 생산을 통해 인건비 등 비용 절감은 물론이고 매출 확대 효과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숙련공을 기반으로 한 품질 및 기술 경쟁력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마쓰우리 도오모 주켄 회장은 “많은 기업이 인건비를 깎고 공장 이전을 통해 단기적인 이익을 취하려고만 한다”면서 “경영자와 노동자가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품질·기술 위주의 일본 기업들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