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품소재 세계 일류화를 위해] (4부)에필로그 (3)독일 부품소재 기업

독일 작센주 드레스덴에 있는 라이프니츠 고체·소재 연구소(IFW).
독일 작센주 드레스덴에 있는 라이프니츠 고체·소재 연구소(IFW).

  독일인의 우직한 연구개발(R&D)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전 세계 LCD용 액정 시장을 석권한 독일 머크는 과거 액정을 ‘불필요한 유리(uberflussigcrystal)’라고 조롱하던 이들로부터 시달림을 당해야 했다. 머크가 액정연구에 착수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훨씬 지난 1904년이다. 반면에 액정이 디스플레이용 소재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약 70년이 지난 1970년대다. 그나마 지금처럼 매년 수천억원대 시장을 형성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연구 시작 이후 7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어디에 쓰게 될지도 모르는 액정 연구를 위해 매년 적지 않은 연구비를 지출한 셈이다.

회사 안팎에서는 액정을 뜻하는 독일어 ‘flussigkeitscrystal’에 ‘불필요한’이라는 의미를 가진 ‘uberflussig’를 합성해 불필요한 유리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 액정을 불필요한 유리라고 부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곱지 않은 회사 내외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줄곧 연구에 매진한 기술자들을 칭송한다. 머크의 사례처럼 100년 뒤를 내다보는 장기적 안목이 오늘날 부품소재 강국 독일을 만들었다.

◇헌법에 보장된 연구 독립=이처럼 독일 산업·학계·연구기관 엔지니어들은 R&D의 단기적인 손익 계산에 얽매이지 않는다. ‘돈’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프로젝트가 얼마나 많은 논문을 출판했는지, 연구 논문이 다른 논문에 인용된 횟수는 얼마인지가 과제의 주요 평가 항목이다. 신소재 상용화가 기획단계부터 짧게는 5년, 길게는 수십년씩 걸린다는 점에서 독일의 이 같은 연구토양은 후방산업 육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독일 3대 국책연구기관 중 하나인 라이프니츠 연구소는 기업의 단기 성과주의가 연구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재정의 절반은 연방정부에서, 나머지는 지방정부로부터 지원받는다. 정부 자금을 지원받더라도 정부가 연구 주제에 간섭하는 일은 일절 없다.

이민하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박사는 “독일은 정부가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주제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헌법에 조항을 마련했다”며 “이 때문에 과학자들이 창의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프로젝트별로 외부단체·기업 등 제3자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을 때도 전체 연구비의 30%를 넘지 않도록 제한한다. 이를 넘길 경우 자금 지원 단체의 입김에 휘말려 자칫 장기 프로젝트의 방향성이 흔들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연구자들이 R&D 자금을 따내기 위해 외부 프로젝트 수주전에 대거 참여해야 하는 국내 사정과 큰 차이를 보인다. 루드비히 슐츠 라이프니츠 고체·소재 연구소(IFW)장은 “1년에 한번 연구주제를 기획하는데 이때 주로 의견을 개진하는 주체는 젊은 연구자들”이라며 “기획 절차는 민주성을 제1 원칙으로 한다”고 설명했다.

국내에 MP3 원천기술 연구기관으로 잘 알려진 독일 프라운호퍼 연구소도 기업과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되 연구의 큰 방향은 자율적으로 결정한다. 베른트 키백 프라운호퍼 다공성금속소재 연구소장은 “수소연료자동차에 쓰이는 수소저장용 소재 연구는 현재 15년 장기 계획에 따라 매년 투자 규모를 늘리고 있다”며 “향후 사업화를 고려하고는 있지만 상업적인 성과는 연구단계에서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세계로 뻗는 현지 연구센터=독일 부품소재기업과 연구소들은 활발한 해외 연구센터 진출을 통해 현지 파트너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최종 사용자가 원하는 부품소재의 트렌드를 먼저 읽고 발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서다. 머크는 액정 원소재는 독일 다름슈타트 공장에서 생산하지만 최종 완제품 제조 과정인 ‘합성’은 고객사가 위치한 국가에서 진행된다. 이를 위해 각국에 합성라인과 함께 연구소를 두고 있다. 국내도 경기도 포승에 액정 합성공장 및 연구센터를 두고 있다. 일본·대만에도 각각 연구센터가 있다.

프라운호퍼는 응용과학에 집중하는 연구소 특성상 국내외 기업들과 활발히 접촉할 수 있는 장소에 수많은 지역 연구소가 자리해 있다. 한국에도 지난 2006년 부산에 생산 기술 및 응용재료 연구소(IFAM)와 부산대 합작 연구기관인 PNU-IFAM 국제공동연구소가 설립됐다. 서울에서는 건국대학교와 차세대 태양전지 연구소를 개소하기도 했다. 베른트 키백 소장은 “한국에서는 아연 등 기초 소재와 관련한 공동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며 “현지 업체 및 연구소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가장 최신의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학과 연구소 간 활발한 인적교류=지역대학과 연구기관 간의 활발한 인적 교류도 독일 부품소재 산업 성장에 기여했다. 독일 저명 연구소 연구진은 대부분 지역 대학의 교수까지 겸직하고 있다. 드레스덴 공대는 지척에 위치한 막스플랑크·라이프니츠·프라운호퍼 연구진이 전속강의를 진행한다. 국내처럼 학기별로 임시 교수직을 맡는 것이 아니라 두 개 기관에 함께 소속돼 있다. 대학교육이 대부분 국립화돼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반대로 대학 학부생들도 국책 연구기관에서의 활동을 통해 학점을 이수할 수 있다. 루드비히 슐츠 소장은 “드레스덴 공대의 세계화를 위해 지역 연구소들이 다 함께 힘을 합치고 있다”며 “어차피 한 지역 내에서 대학과 연구소가 함께 학문·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종시 모델 드레스덴은?



독일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작센주 드레스덴은 최근 정운찬 총리가 세종시의 벤치마킹 모델로 언급하면서 부쩍 주목받고 있다. 과학기술과 지식산업 클러스터를 합친 ‘과학비즈니스 벨트’가 세종시의 지향점으로 거론된다는 점에서 드레스덴으로부터 배워올 점은 분명히 많다. 실제로 기자가 둘러본 드레스덴은 AMD·캐논·센트로섬·노바엘이디 등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IT 기업들이 한 블록 건너 이웃할 정도로 지근거리에 있었다. 막스플랑크·라이프니츠·프라운호퍼 등 굴지의 연구소는 담장을 마주할 정도로 가까워 굳이 차를 타지 않고도 이동할 수 있을 정도다. 도시 전체가 부품소재에 대한 기초 연구부터 이를 이용한 애플리케이션까지 논스톱으로 둘러볼 수 있는 하나의 거대한 전시관 같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드레스덴이 있기까지는 독일 정부의 철저한 계획 아래 진행된 국가 균형발전 전략이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통일 전 동독지역에서도 동쪽 끝에 있는 드레스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대대적인 폭격이 가해지면서 도시의 80%가 파괴됐다. 사망자만 2만5000여 명에 달했다. 통일 이후 정부가 드레스덴으로 들어가는 기업의 세금을 감면해주는 등 대대적인 지원을 펼쳐 각종 연구소 및 IT 기업들이 이전해오기 시작했다. 현재의 과학비즈니스 벨트의 기초를 다진 셈이다.

특히 독일의 3대 연구기관으로 꼽히는 막스플랑크·라이프니츠·프라운호퍼 연구소가 도시 전체에 걸쳐 빼곡히 들어서 있어 세계 어느 과학 도시보다 막강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막스플랑크가 기초과학 중심의 연구소라면 프라운호퍼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응용과학 연구소다. 라이프니츠는 막스플랑크에서 도출된 기초과학 이론들을 응용과학에 활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이렇게 각자의 역할을 분담한 뒤 활발하게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면서 고도의 기술들이 탄생한다. 역시 인접해 있는 드레스덴 공대는 도시의 이 같은 학문적 성과를 자양분 삼아 성장한다. 이지현 한독파트너스 상무는 “지난해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드레스덴 내 연구소들의 연구 지원비는 오히려 증액됐다”며 “경제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꾸준한 연구를 진행하는 풍토가 드레스덴의 강점”이라고 설명했다.

드레스덴·다름슈타트(독일)=안석현기자 ahngija@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