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리포트] 정보통신 거품에 취하다

[글로벌리포트] 정보통신 거품에 취하다

지식경제사회로 진입하는 독일, 그 꿈과 현실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독일 정부는 지난 2006년부터 해마다 대규모의 정보통신기술(ICT) 국제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이른바 ‘국가 정보통신 정상회담’이라는 이름으로 개최되는 이 국제회의에는 앙겔라 메르켈 연방총리를 비롯한 주요 정책 행위자인 정부 관계부처 장·차관과 관련 업계의 수장들이 모여 최신 정보통신 동향과 디지털사회의 미래에 관한 논의를 펼친다. 4회째를 맞은 이 정상회담은 지난 12월 8일 독일 남부 슈투트가르트에서 화려하게 열렸다.

 ◇독일은 선방중=정상회담에서 소개된 내용을 보면, 디지털사회로 진입하는 기로에서 독일이 상당히 ‘선방’하고 있다는 평가로 요악된다. 기조연설에서 메르켈 연방총리는 “정보통신산업이 독일 전체 경제를 주도할 정도로 위상을 높이고 있다”며 후한 평가를 내렸다. 더구나 “새해에도 지식경제기반 정보통신 산업의 약진이 예상된다”며 흐뭇한 미소를 날리고 있었다. 이런 긍정적인 평가는 무엇보다 ‘2030 델파이(Delphi) 보고서’의 조사결과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세계의 중심을 뜻하는 그리스어 ‘델피’를 차용한 이 보고서에는 그 명칭답게 독일을 비롯한 유럽 주요 국가와 북미, 아시아 지역의 정보통신분야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내용이 담겨 있다.

 조사에는 뮌헨국제정보통신연구소와 유럽정보통신기술센터(EICT) 등 연구단체와 여론조사기관 TNS 인프라테스트가 참여했다. 또 도이체텔레콤, 지멘스, 보다폰, SAP, IBM, 연방기술경제부 등 주요 민간 기업과 정책 행위자들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등 대단위 연구조사였다.

 보고서의 주요 결과는 이렇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정보통신기술이 독일 전체 산업경제의 중심축이 된다는 것. 베른트 파펜바흐 연방기술경제부 차관도 이날 열린 ‘국가 정보통신 정상회담’을 통해 이 같은 결과를 인용하면서 정치권과 관련 업계 간 긴밀한 협력을 약속했다.

 파펜바흐 차관은 “정보지식경제 동향을 분석한 델파이 보고서에 나타나있듯, 이 분야에서 세계 시장의 주도권을 거머쥘 수 있는 독일의 잠재성이 돋보인다”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그는 독일 정부가 적극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는데, 자동차·에너지·의료산업 등에서 정보통신기술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파트너가 곧 정부임을 확언했다.

 ◇과제=아울러 보고서는 향후 독일 정보통신산업의 발전을 위해 개선되어야할 요소들을 지적했다. 무엇보다 ‘디지털 분열’을 극복하라는 것. 직장은 물론 일상에서도 디지털기술에 둘러싸인 오늘의 ‘디지털 시민’에게 ‘평등한’ 접속(Access)을 보장하고, 광대역통신(브로드밴드)을 공급해야 하며, 나아가 미디어능력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디지털 분열상의 극복은 본질적으로 인구사회학적 변동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니만큼 향후 20년이 지난 뒤에야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보고서는 내다봤다.

 보고서는 또 상품유통경제가 원활하게 작동한다고 전제했을 때 인터넷의 확대는 불가피한 현실이므로 정부와 업계가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조치는 디지털 기술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연령인 고령자들에게 미디어능력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결국 각종 사회 교육기관과 정보통신기업이 공동으로 미디어능력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해야한다는 요구로 이어진다. 더구나 점증하는 디지털화 비율의 관점에서 볼 때, 늦어도 15년 뒤에 독일은 물론 유럽과 미국 성인남녀의 직장 및 가정 내 인터넷 이용률이 95%에 달할 것으로 보고서는 내다봤다. 최근 ‘웹 2.0’으로 표현되는 소셜 웹 기능이 각광을 받고 있지만, 이 역시 미디어능력의 향상 없이는 이용률 증가가 매우 더딜 것이라는 분석을 덧붙였다.

 물론 정상회담의 논의와 델파이 보고서가 정보통신산업의 ‘절대진리’를 보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메르켈 연방총리를 비롯한 주요 정책행위자들의 판단이 다소 과장돼있다는 지적도 나오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상회담’은 이런 화려한 평가의 이면에 과연 어떤 구체적인 정보통신정책을 통해 ‘목적달성’이 이루어질 것인지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예컨대 ‘정상회담’이 열린 12월 8일 연방정부는 PC 바이러스 신고를 의무화하는 방침을 발표했다. 올 상반기 중에 실시될 이 방침은 PC에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이를 해당 관청에 신고하도록 의무화한 것인데, 최종 실시 여부는 좀더 지켜보아야 하는 상황이다.

 또 정보통신 관련 정부 핫라인 개설, 연방정보청장(Chief Information Officer) 신설 계획, 총연구비 2억유로 가량의 테세우스 정보사회 연구프로그램, 정부·시민·기업 간의 주요 전자 데이터 교류를 담당하는 시민포털인 ‘드 메일(De-Mail)’ 등 지난 몇 년간 정부차원의 다양한 프로젝트가 시행중이다. 하지만, 정보통신 정상회담이 세 차례나 지나는 동안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한 실정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올해 나온 발언들도 “현실성이 다소 약한 것 아니냐”는 회의적인 시각이 고개를 든다.

 정치권과 델파이 보고서는 국가 차원의 디지털산업 발전이라는, 명목상 뚜렷한 목적을 가졌지만, 대다수가 국민인 디지털 시민의 ‘현실적 요구’와는 무관하게 세계 각지의 ‘전문가’들의 진단에만 지나치게 기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물론 이런 지적에 대한 정치권과 업계의 답은 한결같다.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연방총리의 전폭적인 관심을 받을 수 있지 않으냐는 매우 소극적인 답변이다.

 정상회담이 열린 날 지능전력망(Smart Grids)과 같은 새로운 기술에 관한 논의도 있었지만, 오래된 프로젝트들에 대한 최근 동향과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결국 눈요기에 치중한 행사보다 현실적인 해법이 정보통신산업에도 절실하게 요구되는 셈이다. 독일이 꿈과 현실 사이의 분열을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베를린(독일)=서명준 베를린자유대학교 언론학 박사과정 mjseo101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