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주위에서 창의라는 단어를 많이 듣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혁신과 개혁이라는 단어가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사회학적 유행도 참 빨리 변한다. 얼마 전 ‘세빗2010’ 참가차 독일에 들렀다. 묵었던 호텔의 방 문고리, 샤워부스 손잡이 등 갖은 소품들에서 놀랄만한 정교함과 전통을 느꼈다. 수십 년이 지나도 고장이 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시회에선 많은 새로운 제품과 기술이 소개됐다. 놀라운 것은 호텔에서 느꼈던 전통과 완벽함이 이곳 IT 전시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주요 전시품목은 녹색기술과 보안기술 그리고 융합기술 관련 제품들이었다. 특히 3D TV 제품, 내비게이션 복합 상품, 정보보안과 보안관리가 혼합된 신제품, 에너지 관리 소프트웨어와 컴퓨팅 기술이 혼합된 제품 등 기술적으로 획기적인 제품이기 보다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조합된 신개념 위주의 제품들이 주류를 이뤘다. 여기서도 새로운 아이디어 즉, 창의가 강조되고 있었다.
또 하나 느낀 점은 이제 기술이 더 이상 본질의 문제에 안주하지 않고 사회의 요구와 트렌드에 발 빠르게 영합한다는 것이다. 역사에 남을 만한 기술 개발도 중요하지만 시대의 조류에 맞는 기술과 제품을 개발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러면 연구개발에 있어서 무엇에 주안점을 둬야 할까. 주어진 문제를 남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것이 우선일까 아니면 치밀하고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이 맞을까. 이는 신속성과 완전성 중에서 어디에 우선순위를 둬야 하는 가에 관한 논쟁이다. 창의시대는 곧 기술 우위의 시대를 의미한다. 즉, 기술 우위를 통한 국가 기여 측면에서 판단해야 할 숙제다.
최근 신문지상에서 국가연구개발체계 개편에 대한 기사를 접할 기회가 많다. 어떤 이는 국가연구개발체계를 제대로 된 모습으로 바꾸기 위해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는 지나친 개편이 연구생산력 향상은 커녕 실질적 개발 결과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단언한다. 두 의견 모두 연구개발 당사자와 수혜자의 의견보다는 이상주의적인 주장이 대세를 이루는 경향이 있다. 완벽한 제도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운영의 철학적인 문제 즉, 창의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향 모색이 필요하다. 구호보다는 본질적인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결코 정책적인 효율성 때문에 연구의 창의성이 훼손돼서는 안 된다.
먼저 정부의 연구개발정책의 중심에는 민간의 역량을 올바른 방향으로 유도하는 모습과 국가의 중장기적인 기술우위를 위한 랜드마크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자세를 동시에 견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전근대적인 관리우위의 연구개발체계는 창의시대에 맞지 않다. 창의시대를 리드하기 위해서는 창의가 발현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물론 목표가 없는 창의는 없다. 분명한 푯대가 있어야 하고 창의에도 중심이 있어야 한다. 즉, 큰 산업 흐름을 리드하기 위한 기술의 물꼬가 필요하다.
21세기는 창의시대다. 창의시대에는 제도를 통해 꿈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국가적인 목표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단기적인 목표 달성만 강조하다 보면 창의적인 사고를 유도할 수 없다. 좋은 시스템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창의적 인재와 창의적 사고를 유도하는 제도적 얼개가 중요하다. 국가의 장기적인 경쟁력 확보는 물론 창의적 사고를 가진 우수한 인재들을 유치하기 위해서라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손승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융합기술연구부문 연구위원 swsohn@etr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