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대학원에서 컴퓨터 아키텍처를 전공했다. 학부에서는 컴퓨터 구조론(아키텍처)의 선수과목으로 전자공학, 디지털로직, 회로이론 등을 공부했다. 컴퓨터 아키텍처는 컴퓨터 내부의 구성요소를 식별해 네모 모양의 블랙박스(추상화)로 표시하고, 구성요소(박스)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졸업논문은 최소 비용으로 수요자가 원하는 기능을 충족하는 하드웨어 프로세서를 설계하는 법을 주제로 했다. 전자부품의 개별 기능을 정확히 파악해야 적절하게 배치할 수 있다.
첫 사회생활은 울산 조선소에서 시작했다. 경영기획실에서 정보화 기획 업무를 담당했다. 상사들은 항상 ‘핵심만 보고해라’고 다그쳤다. 이를테면 나는 조선소라는 전통산업 종사자와 컴퓨터 공학이라는 정보기술(IT) 담당자 간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몸소 체득했다. 핵심을 설명하기 위해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배경 설명에 시간을 들였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적당한 의사소통 방법으로 학창시절 배운 아키텍처 표현 방식을 활용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처럼 아키텍처는 구성요소를 식별하고 구성요소 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이때 최적화라는 목적도 달성할 수 있다.
요즘 나는 IT컨설팅을 하고 있다. 좀 더 세부적으로는 엔터프라이즈 아키텍처(EA)와 IT거버넌스분야이다. IT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면서 컨설턴트의 공통분모는 상상력임을 발견했고, 상상력은 창의력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재 모습(As-Is)을 표현할 수 있어야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소통을 통해 미래 모습(To-Be)을 상상할 수 있다는 진리는 그 때와 지금이 다르지 않다.
우리가 잘 아는 트로이전쟁을 보자. 전쟁 발발 전에 아폴로는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폴로는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녀에게 예지력을 주었으나 그녀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화가 난 아폴로가 그녀에게서 설득력을 빼앗았다. 트로이 전쟁이 있던 10년동안 계속 카산드라는 트로이의 멸망을 예측했지만 아무도 이 말을 믿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리스 첩자 취급까지 받았다. 그리스군이 목마만을 남겨두고 퇴각했을 때에도 카산드라가 목마를 불태워야한다고 외치지만 아무도 카산드라의 말을 믿지 않고 결국 목마를 성안으로 끌어 와서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에 아가멤논을 증오하면서도 자신으로 인해 아가멤논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았았다.
다시 IT컨설팅 얘기로 돌아오면 IT컨설팅이란 특정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가진 전문가들이 제반 지식과 직·간접 경험을 활용해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고, 향후 예측되는 전반적인 문제에 대하여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솔루션을 제시해 고객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것이다. 카산드라에게는 없었던 설득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설득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전문성, 커뮤니케이션 능력, 정보수집능력, 통창력, 분석력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이들은 표현력, 상상력과 설득력을 바탕으로 출발한다고 할 수 있겠다. IT컨설턴트의 길을 걷고 있거나 IT컨설턴트의 길을 꿈꾼다면 풍부한 상상력과 설득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컨설턴트의 끓는 피는 표현력, 상상력과 설득력이라는 세 가지 원소의 화학적 결합물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