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칼럼 - 은퇴를 쓸쓸하지 않게 하는 사회

 얼마 전 오랜만에 고교 동창들을 만나 술잔을 기울였다. 화제는 졸업한 지 30년이 됐다는 감회로 시작했지만 술자리는 결국 얼마 남지 않은 직장생활 얘기로 우울하게 끝났다. 교직에 있는 친구를 제외하고 일반 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은 정년까지 다닌다고 해도(이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길어야 7∼8년이라며 노후를 걱정했다.

 직장생활 25년여간 모아놓은 돈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아파트 평수를 넓히느라 은행 대출은 아직도 못 갚았고, 아이들 교육비로 저축 또한 쉽지 않다. 퇴직 후 부부동반 해외여행은 드라마에나 나오는 얘기다. 결혼이 늦은 친구는 맞벌이는 물론이고 투잡까지 고민했다.

 올해는 전후(戰後) 베이비붐 세대가 대규모 은퇴를 시작하는 첫해다. 베이비붐 세대란 한국 전쟁 종전 후인 1955년부터 산아제한 정책 도입 직전인 1963년까지 9년에 걸쳐 태어난 세대를 말한다. 민간 경제연구소는 올해부터 9년에 걸쳐 베이비붐 세대 취업자 532만명 중 자영업자 등을 제외한 임금 근로자 311만명이 은퇴할 전망이다. 만 55세는 한창 일할 때다. 가족 생계를 아직 책임져야 하는 나이다. 또 노년(만 65세)이라고 불리기엔 아직 청춘이다.

 지난해 말 KT는 국내 기업 사상 최대 규모인 5992명을 명예퇴직시켰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그야말로 한창인 50.1세다. 기업 입장에선 고임금자의 정리로 당장 인건비를 절약할지 모르지만 이들에겐 직장 생활 20여년의 노하우와 인적 네트워크가 있다. 기업으로선 그만큼 계산할 수 없는 손실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우리나라는 국가적으로 베이비 붐 세대의 퇴장에 아무런 준비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노년이 비참해질 소지를 안고 있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은퇴를 맞는다. 은행권의 저축상품은 저금리 기조로 생활비를 대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자기 적성을 고려하지 않거나 철저한 조사 없이 창업에 나섰다가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을 날리는 사례도 부지기수다.

 우리보다 먼저 베이비 붐 세대의 퇴직 러시를 경험한 미국이나 일본은 미리 준비했지만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만 했다. 1990년대 초반에 시작된 일본의 제로 성장,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의 주된 요인이 ‘단카이 세대’의 은퇴였다. 1950·1960년대 청년으로 성장했던 일본 단카이 세대가 1990년대 초 일자리를 잃으면서 소비를 줄인 것이 내수시장 위축과 투자 감소로 이어졌다. 미국은 연금제도가 발달하고 저출산에 고령사회 진입 속도가 우리나라보다 느려 충격이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가는 세월에 오는 백발’이란 말이 있다. 누구도 늙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주름은 고생의 흔적이 아니라 경험의 훈장이다. 베이비 붐 세대들은 한국경제 성장을 이끈 주역이다. 이들을 제대로 대접하는 것은 가뜩이나 취업도 어려운 지금의 20·30대에게 그나마 미래 희망을 잃지 않게 해준다.

홍승모 전자담당smho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