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부자] 닌텐도신화 만든 야마우치 히로시

1990년대 초 걸프전 당시 파괴된 이라크 바그다드의 한 가옥에서 `게임보이`가 발견됐다. 일본 게임회사 닌텐도가 제작한 게임보이는 외관이 심하게 손상됐는데도 오락 기능과 소리 등이 정상적으로 작동돼 화제가 됐다.

"어린이들이 갖고 노는 게임기는 절대로 망가져서는 안된다"는 야마우치 히로시(山內博ㆍ83) 당시 닌텐도 사장의 혼이 담겼기 때문에 이 같은 일화가 가능했다. 당시 발견된 게임보이는 미국 뉴욕에 위치한 닌텐도 월드스토어 전시관에 아직도 진열돼 있다.

닌텐도가 바둑 게임(위게임기-바둑도장)을 다른 게임업체보다 한참 늦은 2008년 8월에야 시장에 내놓은 이유는 아마추어 6단 솜씨를 지닌 야마우치가 "게임을 설계한 프로그래머가 바둑에서 나를 이길 때까지는 게임 소프트웨어를 내놓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100% 완벽하게 만들던지 아니면 아예 만들지 말라"는 야마우치의 경영철학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53년간 닌텐도 사장으로 재임하며 화투ㆍ카드를 제조했던 중소기업을 세계 굴지 게임회사로 키운 인물. 닌텐도 주식(10.0% 보유)의 평가차익만 갖고 매년 일본 최고 갑부 `빅5`에 오르는 카리스마 경영인. 1992년 시애틀 매리너스를 인수하며 동양인 가운데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구단 오너로 부상한 인물.

야마우치는 와세다대 법학부 4학년 때(22세)인 1949년 조부(야마우치 쓰무로)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가업인 닌텐도를 물려받았고 2002년 사장직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53년 동안 회사를 운영하며 일본 재계사에 영원히 남을 숱한 경영 신화를 창조했다.

야마우치가 막대한 부를 쌓은 이유도 역설적으로 한눈 팔지 않고 기업을 키우는 데만 주력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재산 중 대부분은 닌텐도 주식의 평가차익이다. 2008년 일본 내 최고 갑부 자리(78억달러)에 올랐을 때는 닌텐도 주식이 1년 만에 2배 이상 급등했기 때문이었고 올해 42억달러로 일본 내 5위로 순위가 하락한 것도 역시 주가가 하락했기 때문이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008년 닌텐도 직원 5130명을 대상으로 종업원 1인당 이익을 160만달러로 산출했다. 이는 골드만삭스(124만달러)나 구글(62만6000달러) 등 세계적인 기업을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이 같은 수익은 직원들에 대한 낮은 봉급과 철저한 아웃소싱 때문이었다고 FT는 분석했다.

회사 경영은 `짠물 방식`을 고집했지만 문화와 의료 등 보람 있는 일을 할 때는 사재를 아까워하지 않았다. 교토의 오구라(小倉) 문화재단법인이 테마파크를 건설할 때 건설비용 21억엔을 모두 개인 재산에서 부담했다. 2007년 초 교토대학 부속병원이 300실 규모 새 병동을 건설할 때도 흔쾌히 개인 재산 70억엔을 기부했다. 일본의 역사도시 교토는 야마우치의 고향이자 닌텐도 본사가 위치한 곳이다. 자신이 인수한 시애틀 매리너스 야구팀의 스즈키 이치로 선수가 2004년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최다안타 기록을 경신하자 닌텐도 주식 5000주를 선물로 내놓기도 했다.

53년 동안 닌텐도의 CEO로 재임했던 야마우치는 사업 초기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회사를 키웠다. 1950년대 카드 제조업에 의존했던 회사가 더 이상 성장성을 보이지 못하자 라면제조업, 모텔업, 택시운수업 등 사업을 전면 다각화했다.

"빚더미에 올라 있던 회사가 언제 망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라고 그는 회고했다. 하지만 사업 다각화 계획은 잇따라 실패했고 그에게 "한우물만 파는 기업이 더 성공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우쳐줬다. 2002년 사장직을 이와타 사토시에게 물려줄 때도 "다른 업종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마라"는 당부를 남겼을 정도다.

은퇴한 이후에도 오늘날의 닌텐도와 자신을 만들어준 게임산업에 대해서는 금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2005년 이사직에서 퇴임할 당시 닌텐도는 50년 넘게 근무한 공적을 평가해 퇴직금 12억3600만엔을 지급했다.

하지만 야마우치는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별도 퇴직금을 받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전액을 회사에 다시 기증했다. 이에 앞서 2002년 사장직에서 퇴임한 직후에는 사재 200억엔을 털어 게임 관련 벤처회사를 지원하는 펀드큐라는 투자펀드를 설립하기도 했다.

향토기업 닌텐도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냈지만 그의 경영철학은 철저한 분석보다는 직관에 더 의존한 측면이 강했다. 회사 내부에서도 "통계에 대한 맹신은 눈과 귀를 어둡게 만든다"며 숫자로 알 수 없는 영감을 믿으라고 강조했을 정도다.

시장조사를 어떻게 하는지 묻는 기자에게는 "우리가 시장을 창조하고 있는데 시장조사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퉁명스럽게 답해 화제가 됐다. 미야모토 시게루 게임사업본부장이 "야마우치 사장이 웃는 것을 보기 위해 열심히 일하게 됐다"고 말했을 정도로 직원에게도 엄격하게 대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카리스마가 넘쳐나는 그의 경영철학은 `원맨(One-Man) 경영자`라는 달갑지 않는 별명도 안겨줬다.

하지만 야마우치는 사장직에서 물러날 때 가족이 아니라 전문경영인(이와타 사토루 현 사장)에게 자신의 자리를 넘겨줬다.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다" "게임사업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해야 한다"는 그의 경영철학이 반영된 조치였다. 본인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회사의 기강을 세워 놓았지만 소프트웨어 개발을 담당하는 전문 인력에게는 마음껏 창조적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경영 환경을 조성해 줬다. 그 결과 울트라핸드, 게임보이, 패미콤, 게임앤드워치, 닌텐도DS, 슈퍼마리오, 포켓몬스터, 젤다 등 세계 게임산업 역사를 바꾼 수많은 게임기와 소프트웨어가 탄생할 수 있었다.

■ He is…

1927년 11월 7일 교토에서 출생. 조부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와세다대학교를 중퇴하고 22세 나이에 닌텐도 사장에 취임했다. 2002년 사장직에서 물러났고 2005년부터는 상담역으로 활동하며 회사에 조언하고 있다. 사업 초기 3번의 파산위기를 거친 뒤 울트라핸드(1967년)를 히트시켜 사업 기반을 닦았고 게임앤드워치(1979년)와 패밀리컴퓨터(1983년) 시리즈를 잇달아 히트시키며 세계 최고 게임회사로 성장시켰다. 1992년 동양인으로는 처음 메이저리그 구단을 인수하며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취미는 바둑(아마추어 6단)과 명상. 닌텐도 주식(지분 10.0%) 평가차익으로 42억달러 재산을 지녀 포브스 집계 갑부 순위에서 일본 내 5위에 올라 있다. 재임 시절 특유의 카리스라와 결단력으로 닌텐도의 게임 신화를 창조했지만 파격적인 독설과 직설적인 화법 때문에 구설에 자주 오르기도 했다.

[매일경제 도쿄 = 채수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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