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방송 카메라와 기자들 시선이 온몸으로 쏠리는 걸 느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던진 답변은 크지 않지만 단호했다. "올해 말까지 선정을 마치겠습니다."
지난 18일 방송통신위원회가 종합편성ㆍ보도채널 선정 로드맵을 밝히는 기자회견.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올해 안에 종편 선정이 어렵지 않겠는가`라고 기자들이 반복해서 질문한 데 대해 곤혹스러울 만도 했다.
한 고개를 어렵게 넘으면 또 다른 고개가 나오는 힘든 여정. 종편 사업자 선정이 그랬다. 지난해 미디어법 국회 통과와 헌법재판소 판결이라는 큰 고비를 넘었지만 방통위 상임위원(민주당 추천 몫)이 갑작스럽게 사임하면서 종편 일정 발표가 자꾸 지연됐다.
4월 국회에서 후임 방통위원에 대한 추천안 처리가 무산되면서 `연내 선정`이라는 큰 방향마저 위태로워 보였다. 6ㆍ2 지방선거도 무시하지 못할 변수였다. 이때 최 위원장이 다시 한 번 팔을 걷어붙였다. 더 늦기 전에 일정을 공개해야 한다며 방통위 내외부 이견을 조율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18일 기자회견 자리는 그런 추진력이 낳은 작은 결과물이었다. 이로써 종편 선정에 대한 안개가 걷히고 미디어산업 재편을 통한 글로벌 미디어 탄생 신호탄이 올랐다.
종합편성채널은 지상파TV와 같이 보도, 교양, 오락, 스포츠 등을 편성할 수 있는 채널이다. 케이블TV 등을 통해 24시간 방송하며 중간광고도 허용된다.
현재 케이블TV에는 160여 개 채널이 있지만 시청자들은 항상 "채널이 많아도 볼 게 없다"는 불만을 제기했다. 지상파 방송사가 각각 7개 계열사 채널사용사업자(PP)를 소유해 지상파 방송을 재탕ㆍ삼탕 내보내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종편은 현재 KBS, MBC, SBS 등 지상파 3사가 과점해 `콘텐츠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방송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그가 종합편성채널 선정을 국민에게 `약속`한 것은 한국에서도 국력에 걸맞은 글로벌 미디어가 나와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다. 지난해 미국 타임워너, 영국 BBC, 일본 NHK 등을 두루 방문한 후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점을 절감했다.
특히 한국어라는 언어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 콘텐츠만 있으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최 위원장은 종편 선정 기준을 묻는 기자회견에서도 여러 차례 그런 의지를 밝혔다.
"언어적 장벽은 스토리텔링으로 뛰어넘을 수 있어요. 기존 지상파든, 새로운 방송 기업이든 한계를 뛰어넘고 글로벌 미디어로서 내일을 꿈꾸는 기업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세계 10~20위권에 드는 글로벌 미디어 그룹이 1~2개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루가 다르게 판도가 변화하는 글로벌 무한경쟁 룰은 미디어산업 분야라고 예외가 아니다. 미국 최대 케이블방송 컴캐스트가 NBC유니버설을 인수하고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매각을 시도하는 게 대표적 사례다. 최 위원장이 미디어 빅뱅과 종편 선정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제가 60년대부터 기자 생활을 했지만 그때는 언론매체가 몇 개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곧 컬러TV가 나오고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고 또 삼차원(3D) 방송이 나오지 않습니까. 어느 누구도 안주하면 안 됩니다. 항상 도전하지 않으면 언제든 도전받는 위치에 놓이고 도태될 수 있습니다. 애플 아이폰 성공도 스티브 잡스처럼 도전 정신이 충만한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물론 애플도 언제 도전받는 위치에 놓일지 모른다. 최 위원장은 세계적 베스트셀러 `구글드(Googled)` 저자인 켄 올레타가 한 말을 언급했다.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MS) 최고경영자로 있을 때 `지금 이 순간 어느 차고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기업이 MS를 위협할 경쟁자`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고 해요. 실제로 빌 게이츠가 얘기한 그 순간에 구글이라는 기업이 태동했어요."
안주하는 기업에는 미래가 없는데 그런 의미에서 끊임없이 도전의식을 불어넣는 이건희 회장은 대단한 분이라고 사석에서 평가하기도 했다.
최 위원장은 기업체 관계자들을 만날 때 `송무백열(松茂柏悅)`이라는 고사성어를 자주 인용한다.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면 옆에 선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뜻이다. 하나의 특출난 기업이 출현하면 주변에 기업 생태계가 형성돼 많은 사람들이 득을 볼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종합편성채널 선정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를 통해 세계 미디어시장에 명함을 내밀 글로벌 미디어가 탄생할 수 있다면 일자리도 늘리고 방송 콘텐츠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
업계 일각에서는 `최 위원장이 정권 유지에 필요한 방송만 신경 쓴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최 위원장이 보고받는 내용 중 70%는 통신 관련 정책일 정도로 통신정책에 상당한 에너지를 쏟고 있다고 방통위 관료들은 전한다.
안 쓰면서 내고 있는 통신비용은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소신하에 `초당 과금제` 도입을 강하게 추진했고 올해 들어서는 과도한 마케팅비를 줄여 이동통신사 투자와 요금 인하를 유도해야 한다며 마케팅 과열 경쟁에 제동을 걸었다. `반시장적 조치`라는 일부 불만 속에서도 방통위가 흔들림 없이 나간 건 최 위원장 뚝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37년생인 최 위원장은 국가 최고 원로에 속한다. 이명박 대통령이나 최 위원장 모두 가난을 체득하며 살았기 때문에 후손에게는 절대 이 같은 고통을 물려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다.
경북 포항 구룡포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부친이 뜻하지 않게 부상하면서 10대 초반부터 소년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당시 초등학생 최시중은 오징어를 어깨에 메고 구룡포 집에서 60리나 떨어진 포항 죽도시장까지 걸어가 오징어를 팔고 쌀을 구하는 힘든 생활을 이어갔다. 오징어를 팔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 다시 60리 길을 걸어야 했다. 1남3녀 중 장남으로서 집안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가슴을 짓눌렀지만 묵묵히 어려운 시절을 참고 견뎌냈다.
구룡포 동부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구룡포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책이 너무 읽고 싶었지만 책을 살 돈이 없었다. 어느 날 중학생 최시중은 포항 시내에 있는 한 서점에 찾아가 점원으로 일하게 해 달라고 사정했다. 월급은 필요 없고 이 서점에 있는 책을 마음대로 읽게 해 달라는 게 조건이었다.
그는 점원으로 일하면서 서점에 있는 책을 몽땅 읽었다. `인간 최시중`이 지닌 기본 소양 중 절반은 그때 습득했다고 최 위원장은 회상했다. 가난한 생활은 계속 이어져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바로 진학하지 못하고 공백기를 거쳐야 했다. 마침내 대구에 있는 대륜고를 수석으로 입학해 장학금을 받고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최 위원장은 최근 천안함 침몰 사건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파장이 작지 않다며 염려스러운 시각을 건넸다.
"천안함 사건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대한민국 국민이 어떠한 안보의식을 가져야 하는지 절실히 생각해볼 계기가 됐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국론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필요해요."
미국이 9ㆍ11 테러를 겪은 이후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겪었던 것처럼 한국도 천안함 사건 이전과 이후가 달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에 놓여 있는데 그동안 너무 잊고 살았던 것 같아요. 9ㆍ11 사태가 미국 역사를 9ㆍ11 이전과 이후로 나누게 만든 것처럼 천안함 사건도 그렇게 될 것으로 봅니다."
어머니를 회상하면서 혹은 언론과 한국 미래를 생각하면서 눈시울을 종종 적시곤 하는 최 위원장이 글로벌 미디어 탄생이라는 꿈을 이룰 수 있을지는 이제 5~6개월간 본인 행보에 달려 있다. 그의 유연한 리더십과 추진력이 한국 미디어 지형을 어떻게 바꿔놓을지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최 위원장이 자주 쓰는 말처럼 `끊임없이 도전하고 성취하는` 방송통신위원장으로 기록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 최시중 위원장의 인생 4모작…신문기자→갤럽 회장→방통위원장→?
=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73)이 후배 언론인을 만날 때마다 입버릇처럼 하는 조언이 있다. `인생 2모작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지난 3월 제주도에서 열린 언론인 세미나에서 언론인들 노후를 걱정하며 "뒷모습이 아름다운 선배로 남고 싶다"며 눈문을 보이기도 했다. 50대 중반 이후 인생에 대비하라고 충고하는 최 위원장 본인은 `인생 3모작`을 일궈냈다.
첫 번째는 기자로서 삶이다. 1964년 동양통신에 입사한 뒤 1965년부터 30년간 동아일보에 몸담았다. 정치부 기자, 정치담당 편집위원, 정치부장, 논설위원이라는 이력이 말해주듯 그는 변화무쌍한 정치권의 진면목을 경험했다. 정치부 기자 시절인 1972년 1월에는 `옥외집회 시위 긴급조처`에 관한 기사를 1면에 보도했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취재원을 대라는 압박에도 불구하고 입을 다물어 몽둥이 찜질을 당하기도 했다.
최 위원장은 오랜 정치권 출입을 통해 거물급 정치인들과 `호형호제`할 만큼 탄탄한 인맥을 쌓았고 특히 민주화운동을 주도해 온 야당 인사들과 가까웠다. 최 위원장이 가장 큰 자산으로 꼽는 폭넓은 인간관계와 포용력, 정치적 감각은 기자 시절 길러진 셈이다.
김영삼(YS) 전 대통령(83)과는 보름에 한 번씩 독대를 할 정도였다. YS가 대권을 쥐면서 함께 정치를 하자고 최 위원장에게 제안했지만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겠다며 거절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동교동계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두 번째는 1994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갤럽조사연구소 회장으로 활동할 때다. 기자 시절 쌓은 인적 자산을 바탕으로 한층 외연을 넓힌 시기다. 2모작 끝 무렵에 최 위원장은 인생에 전환점을 맞는다. 1992년부터 이명박 대통령(MB)의 정치적 자문역을 맡아온 인연으로 2007년 5월부터 그해 말까지 MB 선대위 고문을 맡으면서 `킹 메이커`로서 활약했다. 경북 포항 출신으로 MB와 동향인 최 위원장은 최측근 인사로 꼽힌다. 이 대통령 형인 이상득 국회 부의장과는 서울대 57학번 동기다.
30년에 걸친 언론 경력과 여론 전문가로서 보여준 탁월한 의견 조율 능력은 지금 방송통신위원장 자리로 이동하는 밑거름이 됐다. 여야 상임위원이 2명씩 배치된 방통위를 무난히 이끌어갈 리더십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이제 최 위원장은 방통위원장 임기를 불과 10개월 남겨두고 있다. 종합편성ㆍ보도채널 선정, 무선인터넷 활성화, KBS 수신료 인상, 미디어렙 입법 등 민감하고 비중 있는 정책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최 위원장 행보는 여전히 자신감에 넘친다. 항간에선 방통위원장 연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고 정치권 일각에서는 MB에 이어 또 다른 대통령을 만들어내는 `킹 메이커` 중책을 맡을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이 때문에 최 위원장 `인생 4모작`은 무엇이 될지 방송통신업계는 주목하고 있다. 37년생 최 위원장의 인생 농사는 여전히 진행형인 셈이다.
■ He is …
△1937년 경북 포항 출생 △1957년 대륜고 졸업 △1963년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1964년 동양통신 기자 △1965년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1988년 동아일보 정치부장 △1988년 동아일보 논설위원 △1993년 동아일보 편집국 부국장 △1994년 한국갤럽조사연구소 회장 △2007년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 후보 상임고문
[매일경제 황인혁 기자 / 손재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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