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추진해온 부하에게 없던 셈 치고 원점으로 되돌리자고 말하기가 나도 민망하다. 교통비 빼면 남는 거 없는 부하에게 좀더 버텨보자고 말하기가 나도 면목이 없다. 말 바꾼 사장, 발뺌하는 이사, 이번에도 또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입막음을 해야 한다. 내 조카나 자식이라면 벌써 관두라고 충고했을 것이다. 회사의 한계를 직원의 희생으로 땜빵하는 회사의 중간관리자는 양심도 굳어버렸고 얼굴도 굳어버렸다.
간 쓸개도 내놓더니 드디어 양심마저 저버려야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가?
양심마저 속이지는 말자. 조카나 자식처럼 충고하자. 업무 여건도, 급여도 마뜩찮은 회사에서 상사의 사랑마저 가식이었다면 참 씁쓸하고 슬플 것이다. 진심으로 현실을 고백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원이 거둘 것이 있다면 이야기 해주자. 오늘은 조직의 한계 때문에 미안했지만 내일은 한계 극복이라는 성장으로 보답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일하는 것보다 일하는 사람이 생명력이 길다. 혹시 아는가? 조직의 한계를 솔직히 고백하고 부하의 미래가 걱정된다고 염려했더니, 부하가 “저도 알아요. 하지만 당신 밑에서 일하고 싶어서 떠나지 않습니다. 여건이 좋은 회사에서 편히 지내는 것보다 사람이 좋은 회사에서 고생하며 배워보고 싶어요”라는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서 못 떠나는 게 아니라 알지만 안 떠나는 경우도 많다. 영화 ‘트루먼쇼’의 명대사 중에 “우리는 진짜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세상만을 진짜 현실로 착각할 뿐이다” 라는 대목이 있다. 상사가 보는 비관적 현실이 부하를 내몰고, 상사가 부여잡는 낙관적 미래가 부하의 인내심을 고취시킨다. 양심이 굳어버렸다고 슬퍼하지 말고 잃어버린 긍정성부터 되찾자. 부하에게 양심적인 충고를 하려면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이 정확한지부터 되짚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