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었다. 마치 태극전사가 트로이를 침몰시킨 그리스의 작전을 구사하는 듯했다.
롱킥 패스 연결(킥 앤드 러시), 측면돌파와 정확한 킥, 잘 짜인 세트피스. 그 열매가 너무 일찍 맺었다. 전반 6분 기성용의 킥을 차 넣은 이정수의 골은 원래 그리스가 구사해 왔던 수비수를 뚫고 연결하는 코너킥 세트피스였다. FIFA 랭킹 13위팀에다 2004년 유로컵 우승팀치고는 오늘 보여준 그리스의 공격력이나 팀워크가 약했다. 역시 축구는 심리전이다. 초반 2분을 잘 나가다가 6분 만에 기선을 제압당한 그리스팀은 서둘렀고 파울이 잦아졌다. 기세 싸움에 밀리면서 연결이 끊어지고 실수를 연발했다.
축구는 리듬이다. 뺏을 때는 빨리, 줄 때는 천천히 주는 것. 우리가 이길 때는 느긋하고 상대방이 서두르는 것을 잘 이용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전반 11분 이후 간간이 나온 박지성의 파울처럼 적절하게 끊어주는 것이야말로 좋은 전략이다.
얼음 속 불꽃처럼 냉정함 속의 열정이 필요한 것이 축구다. 전반 15분까지의 공 점유율이나 슈팅, 패스성공률 등 모든 데이터에서 한국이 우세했다. 그리스는 이미 주눅들었고 한국팀은 침착했다. 냉점함 속에 보여준 전반 27분 양박의 불꽃 같은 작품. 박지성의 긴 패스를 받은 박주영의 볼이 골키퍼의 발에 맞고 나가서 아쉬웠지만 환상적이었다.
후반전 7분은 시작 10분과 종료 10분 안에 대부분 실점한다는 그리스에 대한 평가를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스는 예상대로 공격패턴으로 바꿔 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공격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명불허전. 캡틴 박지성이 그리스 수비수 3명을 제치고 골키퍼까지 속이며 골을 성공시켰을 땐 심장이 터질 듯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이다.
안 되는 집은 어떡해도 안 되는 법이다. 그리스는 계속 공격했지만 무력하고 위협적이지 못했다. 후반 14분 차두리에게 막힌 사마라스와 주장 하리스테아스까지 교체하면서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호흡이 맞지 않았고 오히려 이영표가 게카스를 갖고 놀았다.
부지런함은 한국팀의 트레이드 마크다. 게다가 그리스 감독 오토 레하겔 감독이 두려워했듯이 한국선수들은 표범처럼 빨랐다. 후반 20분쯤 부지런한 차두리와 김정우는 박주영과 이청용에게 쉼없이 연결해 댔지만 그리스는 여전히 느렸다. 이미 지친 것이다.
하지만 전쟁에 나선 장수가 그냥 죽을 수는 없는 법. 후반 25분부터 교체된 선수들이 활약하면서 그리스의 공격력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29분 김남일이 투입되면서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종료 10분 전이 되자 승리를 확신한 듯 허정무 감독은 공격수들을 신진으로 교체했다. 승리의 여신 니케는 오늘 그리스를 외면했다.
[오재근 한국체육대학 교수]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