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엔씨소프트의 `아이온` 게임을 즐기던 A씨(아이디:음별)는 지난 18일 회사 측으로부터 계정이 영구정지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의 컴퓨터에서 갑자기 불법 프로그램이 발견됐다는 것.
엔씨소프트는 `오토(게임 내 아이템 자동사냥)` 프로그램 등을 불법 프로그램으로 규정, 선의의 피해자들을 막는다는 미명 하에 불법 프로그램 사용 흔적이 있는 계정들에 대해 `영구이용 제한`조치를 취하고 있다. 운영정책 상 가장 강력한 제재 조치다. 지난해 말까지 영구 정지된 계정만 60만 개 수준. 올해에도 수천, 수만 개씩 오토 계정이 정지되고 있다.
A씨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오토는 커녕, 최근 포맷을 실시한 이후 음악이나 영화 등 일부 프로그램 밖에 깔려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1대 1 문의를 통해 엔씨소프트 측에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돌아오는 답변은 `7월 18일 … 불법 프로그램이 발견됐다`는 틀에 박힌 내용 뿐.
다시 한번 답변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IP 주소가 차단되면서 `플레이엔씨(plaync)` 사이트로의 접속이 거절됐다. 고객센터로 연락하라는 메세지가 보였지만 저녁 8시가 넘은 시간 고객센터로의 연결은 되지 않았다.
A씨는 "경찰 사이버수사대에도 알아봤지만 `회사 상대로는 수사하지 않는다`는 얘기만 들었다"며 "민사 소송도 고려 중이지만 엔씨소프트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했던 사람들이 최근 줄줄이 포기하는 것을 보니 난감하다"고 말했다.
그는 27일 오전 엔씨소프트 본사에 컴퓨터를 갖고 찾아가 어떤 불법 프로그램이 문제가 된 것인지 직접 증명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엔씨소프트 측은 "회사 기밀 상 밝히기 어렵다"며 마지막 도움 요청마저 거절해 버렸다. 검출 시스템 오류로 인해 불법 사용자로 잘못 선정이 되도 사실상 구제받을 기회 조차 없는 것이다.
◇ 계정 도용으로 영구정지 `대책 없다`
실제 A씨와 같은 피해사례는 끊이지 않고 있다. 엔씨소프트의 게임 `아이온`은 지난 2008년 오픈베타 서비스가 시작된 이후 온라인 게임 분야에서 80주째 1위 자리를 지켜온 대표적인 인기 게임 중 하나다.
한국소비자원에는 해킹을 통한 계정 도용 등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불법 프로그램 사용자로 낙인, `아이온` 계정이 영구정지된 피해자들의 사례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국소비자원 한 관계자는 "회사 측에 피해자들의 통신 자료를 요구해도 현 법률 상 법원이나 수사기관이 제공받을 수 있는 자료보다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며 "분쟁 판단 시 다소 어려움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번 분쟁 조정 때에도 엔씨소프트 측에 증거자료들을 요청했으나 불법 프로그램 사용내역 결과들만 간단히 공지된 채 피해자들의 계정압류 해제 요구가 거절한 바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엔씨소프트 측은 "오토 프로그램(BOT) 사용과 관련해 소비자원이 요구한 부분에 대해 충분히 자료들을 제출했다"고 주장했다.
다른 게임사들의 경우 억울하게 계정이 압류된 경우 계정 정지를 해제해 주기도 하지만 엔씨소프트에서 `아이온` 계정을 되돌려 준 사례는 사실상 찾아보기 힘들다. 피해자들이 억울하게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기회 자체를 회사 측에서 거부하고 있기 때문.
플레이엔씨 `아이온` 게시판의 한 피해자는 "새로운 계정으로라도 `아이온`을 계속 하고 싶지만 또 영문 없이 계정이 정지될까봐 무섭다"며 "차라리 오토 프로그램을 이용해 정지 당했다면 다음부턴 사용 안하면 될텐데…"라고 토로했다.
한국소비자원 관계자는 "불법 프로그램 사용 적발 시 바로 계정 영구정지 조치를 취하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엔씨소프트는 불법 프로그램 사용이 확인된 계정에 대해 계정이용 제한과 안내 메일 발송만 할 뿐 미리 관련 사실을 해당 이용자에게 통보하지 않고 있다. 사전에 제재 사실을 통보할 경우 이용자가 게임 상에서 부당하게 획득한 재화를 모두 이동시키는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점에서다. 이런 규정은 이용약관에 명시돼 있다.
문제는 이런 약관 때문에 소비자들로선 억울하게 계정이 압류되도 마땅히 계정을 되찾을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HIH 법률사무소 관계자는 "아이디를 도용당해 불법 프로그램 사용 흔적이 남은 이용자들에게까지 책임을 지우며 아이디를 영구 압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해킹 등에 따른 억울한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선의의 피해자들을 막기 위해서라도 일단 1, 2차 경고를 주거나 일정 기간 계정정지 등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 회사 측에 유리한 약관? 개별 사안별로 승소 가능성도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엔씨소프트는 특별히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회사 측은 "오랜 기간 시스템 개발과 테스트를 거친 데다 숙련된 전문가들이 직접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만큼 검출 결과에 대해 신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게임에 접속한 캐릭터(계정)가 불법프로그램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만 검출하는 만큼 아이디를 도용해 접속한 것인지는 가려낼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상 아이디 도용으로 인한 선의의 피해자는 회사 측이 구별해 낼 수 없다는 얘기다.
엔씨소프트 측은 "피해자들이 직접 고객센터 내 신고센터에 신고하면 피해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고 답변했지만 계정도용 피해접수의 경우 피해 발생 15일 이내 신고하지 않으면 피해 확인이 불가능하다. 군 복무 중이라 빠른 신고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런 조항은 예외없이 적용된다.
계정 이용제한이 해제되려면 아이디 도용 피해 발생시점과 불법프로그램 검출 시점이 동일해야만 한다. 엔씨소프트의 이용약관이 다른 게임사들에 비해 회사 측에 유리하게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엔씨소프트에선 계정 도용이 확인된다고 해도 규정 상 강탈당한 아이템이나 게임머니를 100% 돌려주지 않고 있다. 또 다른 게임들에선 합법적인 캐릭터 양도가 `아이온`에서는 불법으로 간주된다. 고객센터에 문의해도 통화가 되지 않거나 1대 1로 문의하라는 답변이 대다수다. 1대 1로 문의해도 회사 측에서 15일 내 답변이 없으면 더 이상의 답변은 없다.
그 동안 엔씨소프트가 수많은 소송에서 승소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철저한` 이용약관에 기반했기 때문.
한국소비자원 측은 "이용약관과 운영정책 상에서 게임 이용자들에 대한 과잉 제재 부문이 드러난다면 이용자들이 민사 소송에서 승소할 가능성도 있지만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는 "회사 측의 계정 압류 자체가 문제되긴 힘들겠지만 각 사안에 따라서는 다른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라며 "고의적인 프로그램 사용 여부가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이는 만큼 이에 대한 입증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피해자는 "어제의 유저가 오늘은 갑자기 불법 사용자로 추락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내가 무죄라는 사실을 입증해 압류된 계정을 꼭 되찾고 싶다"고 말했다.
[매일경제 정나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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